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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보다 강한 펜, 때로는 펜보다 강한 꽃 한 송이

스페인 마드리드의 소로야 미술관

‘아, 내가 어쩌다 여기에 서 있을까?’     


마드리드의 소로야 미술관 정문 앞에서 뙤약볕 아래 한참 동안 줄을 섰다. 

호아킨 소로야라는 스페인 화가는 이제 막 알게 된 참이었다. 그저 프라도 미술관에서 눈여겨봤던 작가의 이름이 붙은 뮤지엄이 따로 있길래 찾아온 것일 뿐인데. 한국에서 근무한 여느 박물관처럼 작지만 알차고, 사람은 없어서 더욱 쾌적한 그런 걸 상상한 터였다. 이렇게 많은 인파가 북적댈 줄 몰랐다. 굉장히 유명하고 인기 있는 화가임에 틀림없었다. 앎이 부족하고 잘 몰라서 발생한, 부덕의 소치였다.  


입장 후, 관람 티켓을 구매하는 오피스 내부의 모습. 많은 관람객으로 붐비고 있다.

   

나는 학예사지만 박물관에서 일하므로 미술엔 문외한이다. 유럽과 미국에서 ‘Museum’이라 표기하는 문화 기관은 우리나라에서 ‘박물관’과 ‘미술관’으로 나뉜다. 법률 제19592호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에서도 보듯이 박물관은 역사, 고고, 인류, 민속, 예술, 동물, 식물, 광물, 과학, 기술, 산업 등에 대한 자료를 대하고, 미술관은 서화, 조각, 공예, 건축, 사진 등 미술에 관한 자료를 대상으로 한다. 박물관 분야에 속하는 인류학을 전공했지만, 박물관과 미술관이 ‘및’이란 단어로 엮인 이상, 미술관에도 늘 관심을 기울이고 들락날락거린다.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     
제2조(정의)

1. “박물관”이란 문화ㆍ예술ㆍ학문의 발전과 일반 공중의 문화향유 및 평생교육 증진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역사ㆍ고고ㆍ인류ㆍ민속ㆍ예술ㆍ동물ㆍ식물ㆍ광물ㆍ과학ㆍ기술ㆍ산업 등에 관한 자료를 수집ㆍ관리ㆍ보존ㆍ조사ㆍ연구ㆍ전시ㆍ교육하는 시설을 말한다.     
2. “미술관”이란 문화ㆍ예술의 발전과 일반 공중의 문화향유 및 평생교육 증진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박물관 중에서 특히 서화ㆍ조각ㆍ공예ㆍ건축ㆍ사진 등 미술에 관한 자료를 수집ㆍ관리ㆍ보존ㆍ조사ㆍ연구ㆍ전시ㆍ교육하는 시설을 말한다.


지금은 다른 곳으로 옮겨간 옛 상사는 ‘및’이라는 단어를 참 싫어하는 분이었다. 기안에 ‘및’이 들어가면 수정 지시나 잔소리가 뒤따라오기도 했다. 모두 의아해했지만, 감히 그 이유를 여쭤볼 생각은 못 했다. 평소에도 한글로 표기가 가능한 영어 표현을 극도로 꺼렸으니 이 단어에도 어련히 이유가 있을 거라 짐작할 뿐이었다. 어떤 이는 그분이 국문학도라 중국어나 일본어에서 영향을 받은 단어를 기피하는 거라며 나름 타당성을 부여하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나의 아버지에게도 그런 단어가 있다. 탐탁지 않아 하시는 단어가 많은 가운데, ‘베풀다’라는 말이 있다. ‘베풀다’는 옛날 ‘베프다’라는 단어가 원순 모음화를 겪으면서 바뀐 말인데, 주로 ‘잔치를 베풀다’, ‘자비를 베풀다’, ‘동정을 베풀다’ 등 일을 벌이거나 남을 돕는 일을 의미한다. 그런데 베푸는 것은 ‘시혜(施惠)’의 의미로서 가난한 자, 소외된 자, 불쌍한 자에게 향하는 다소 수직적인 위계 관계를 내포하기도 한다. 베풂의 대상은 시혜를 행한 자에게 다시 베풀 수는 없다. 즉,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경향이 있는 말이다. 그래서 보다 수평적인 ‘나누다’라는 말을 사용하길 좋아하신다.     


이처럼 언어는 우리가 의사소통을 위해 서로 음성과 내용에 관해 합의한 수단이지만, 각자 나름의 생각이나 뉘앙스 차이로 인해 다른 의견을 가질 때가 있다. 그래서 말을 할 때, 말을 글로 작성할 때도 단어 하나, 문장 구조 하나 유의해서 써야 한다는 걸 절감하는 일이 많다. 그만큼 언어는 섬세하지만 또 치밀하지 못해서 다루기 어려운 도구다.      


외국에서 마주치는 한글은 반갑거나 당혹스럽거나 둘 중 하나다. 

일본과 중국처럼 가까운 나라에서는 공공장소에 한글 표기나 방송을 해주는 경우가 있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는 한글로 된 리플릿이 심지어 문법적인 오류도 없어 신기하고 감사한 마음이다. 그러나 한글로 쓴 경고문을 외국에서 마주친다면, 말 그대로 경고일 뿐이더라도 폭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영어나 다른 언어 없이 오로지 한글로만 있는 경고문이라면, 경고의 대상이 엄연히 한국인이며, 이전까지 경고문의 내용을 위반한 한국인이 많았다는 암시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낙서금지’

‘경고! 들어가지 마시오.’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마세요.’

.. 등 한국인 관광객이 많은 외국 도시라면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재미있는 건 한글이 아니라 다른 언어도 함께 있으면 약간 다행이라는 마음도 든다는 것이다.    

 

나는 밖에서 30분 정도 기다린 후에 미술관 내부로 입장할 수 있었다. 

예약 없이 방문했던 피카소 미술관에서도 약 40분 정도 대기했으니 비슷한 정도다. 소로야 미술관은 호아킨 소로야가 그의 가족과 함께 1911년부터 1923년, 죽을 때까지 살았던 집이다. 소로야를 기념하는 미술관으로 변모하여 1932년 오픈하였고, 원래의 실내 인테리어와 데코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소로야가 생전 수집했던 조각품, 도자기, 보석류뿐 아니라 가구, 카펫, 옷가지, 편지 등이 모두 남아있다.     


티켓 오피스로 들어가기 전 건물의 외관이다. 집 내부에도 작은 중정이 있는 게 보인다.
정문 앞에는 작은 정원이 있다.
정원에는 관람객을 위한 벤치와 소로야가 수집했던 조각상 등도 있다.


소로야 미술관은 평화롭고 한적하다. 

시끌시끌한 마드리드 시내 한복판이지만, 내부로 들어오니 레몬처럼 샛노란 건물 벽과 아기자기한 정원이 펼쳐져 남부 유럽의 리조트에 들어온 양 눈을 즐겁게 한다. 분수는 작고, 수풀 담장은 낮아 가련하지만 찬란한 색채를 추구하는 소로야의 취향이 드러난다. 그리고 이곳을 관리하는 직원들은 미술관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마법을 부려놓았다. 어떠한 언어적인, 직접적인 메시지 없이도 말을 걸어오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다.


전시실 내부에는 많은 의자가 있고, 그 위에 말린 꽃 한 송이 또는 솔방울 등이 올려져 있다.


의자와 소파 위에 ‘앉지 마세요’라는 경고문을, 꽃 한 송이 올려놓는 것으로 대신했다. 

말린 꽃, 목화솜 가지, 또는 솔방울 하나를 의자 위에 놓음으로써 관람객은 앉는 용도의 의자가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다. 경고의 언어 대신 꽃 한 송이로서 은근하게 표현하는 것이 안락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의 미술관과 잘 맞아떨어졌다.

어차피 앉지 못하게 할 의자라면 치워버리는 게 낫지 않은가 생각할 수도 있다. 방마다 의자는 매우 많고, 모두 앉지 못하게 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의자가 놓여 있어서 이 장소가 단순한 미술관이 아니라, 소로야와 그 가족의 생활공간이었다는 걸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삭막하지 않고 푸근하다.


소로야 미술관 전시실 중 일부다.


방마다 그의 그림이 잔뜩 걸렸다. 그림 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소로야의 가족이다. 소로야는 애처가로 유명했던 모양이다. 아내인 클로틸데가 외출을 앞두고 예쁘게 꾸민 모습, 셋째를 막 출산하여 흐트러졌지만 순결하고 포근해 보이는 아내와 아기, 해변가를 걷고, 화병 옆에서 책을 읽는 아이들 등 삶의 다양한 순간들이 펼쳐진다. 소로야 미술관은 그가 얼마나 가정적인 화가였는지 알 수 있게 한다. 가족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항상 꿈꾸듯 아련하고, 따스하다.    


뮤지엄샵에서 만난 그의 가족이 담긴 그림들이다.
소로야의 아들 호아킨 소로야 가르시아의 초상이다.
소로야의 집과 정원도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그의 따뜻한 시선은 가족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사회적으로 외면받는 약자에게도 관심이 많았다. 그것은 소로야 미술관이 아니라, 전날 방문한 프라도 미술관에서 이미 확인한 바였다. 프라도 미술관은 그의 이름을 처음 각인하게 된 장소였다.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를 보고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있는데, 발길을 멈추게 되는 그림이 있었다. 호아킨 소로야의 것이었다. 거대한 그림을 가득 채운 것은 사랑스러운 그의 가족이 아니었다. 선실로 보이는 좁은 공간에서 한 청년을 치료하는 두 중년의 모습이었다. 르포르타주에 나선 한 기자가 찍은 한순간의 사진과도 같았다. 옆의 패널로 시선을 옮겼더니 제목이 기가 막히다.


‘그들은 여전히 물고기가 비싸다고 말한다!(And They Still Say Fish is Expensive!)’     


호아킨 소로야, <그들은 여전히 물고기가 비싸다고 말한다!>, 1894년작, 프라도 미술관 소장


이게 대체 무슨 제목이지? 의미가 무엇인지, 어떤 상황인지 궁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제목의 끝에 한탄하듯 마침표 대신 찍힌 느낌표. 상처 입은 어부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가? 왜 젊은 어부는 매서운 바다에 나가 목숨을 걸고 고기잡이를 하고 있는가! 그런데 여전히 물고기가 비싸다고만 말할 텐가, 너희들은! …이런 의미일까?    

 

소로야의 그림 속 이야기를 한번 엿보겠다. 

청년 어부는 바다에서 사고를 당했다. 옆에는 그를 선실로 데려와 바닥에 눕힌 나이 든 어부들이 있다. 부자지간일 수도, 그저 함께 일하는 같은 마을 사람일 수도 있다. 한 명은 청년의 상처를 압박하며 치료하고, 다른 한 명은 청년의 상체를 붙들고 있다. 청년의 벗겨진 웃통에는 목걸이가 걸렸는데, 그 속엔 불행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부적이 들었다. 그리고 뒤편에는 이날 작업한 물고기 더미가 쌓였다.    


위 작품은 스페인 사회의 현실을 보여주는 소로야의 주요 초기작 중 하나다. 이 그림을 그렸을 때 소로야는 겨우 서른 남짓이었다. 젊은 소로야는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프라도 미술관의 전시 설명에 따르면, 그는 1895년 출판된 빈센트 블라스코 이바네스(Vicente Blasco Ibáñez)의 소설 ‘5월의 꽃(Flor de mayo; 영어로는 The Mayflower)’의 마지막 구절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어부들의 비참한 삶을 그린 이 책은 바다에서 사고가 발생하고 난파된 배에서 동료의 시체를 구출하는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이바네스는 왕정을 반대하는 정치적 성향을 가졌고, 자연주의적이고 사회문제를 다룬 향토소설을 많이 썼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로야와의 공통분모는 바로 발렌시아 지역이다. 바로 아메리카 신대륙이 발견된 이후로 계속해서 쇠퇴한 곳이자 펠리페 5세가 스페인 왕으로 등극하면서 자치권을 박탈당한 동네다.


발렌시아의 시련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소로야가 급작스러운 마비로 쓰러졌던 1920년 이후, 스페인내전(1936∼1939년)에는 프랑코를 지원하는 독일과 이탈리아군에 대대적인 폭격을 당해 약 3천 명이 사망했다. 프랑코가 집권한 후에는 발렌시아 자치가 금지되는 것뿐만 아니라, 발렌시아어를 가르치고 말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소로야가 앉아서 그림을 그렸던 의자와 이젤, 그리고 도구들이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가져다준 것은 인상주의 화풍의 인물화와 풍경화였지만, 사람에 대한 관심은 초기작부터 쭉 이어져왔다. 소로야는 이 작품으로 스페인 국립 전시회에서 1등 상을 받고 사랑하는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당신도 이미 알고 있지요? 내가 마드리드에서 이 그림으로 1등 상을 받았고, 사람들은 여전히 물고기가 비싸다고 말한다는 사실을요.”



[스페인 마드리드의 소로야 미술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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