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중반이 되니 이제 10대, 20대를 보며 ‘우와, 어리네’는 말이 입에서 절로 나온다. 거꾸로 ‘엄청 어리다’ 또는 ‘젊어서 좋겠다’라는 말을 귀로 들은 지는 한참 됐다. 아직 늙었다는 소리도 듣지 않는다. 아마도 젊지도, 늙지도 않은 나이인 것 같다. 아, 맞다. 최근에 종합병원에 건강검진을 받으러 갔을 땐 간호사들로부터 ‘아무래도 나이가 어리시니까…’라는 말을 계속 들어야 했다. 그곳은 40대 이상이 되어야 출입이 자연스러워 보이는 장소다. 입꼬리가 씰룩일뻔하다가 금세 민망해지는 게, 그런 어중간한 나이에 돌입했다는 걸 실감 나게 한다.
나이 앞에 '3'을 처음 맞이한 서른에 결혼을 했다. 6년의 연애 기간 끝에 결정한 거라 조금 늦었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집에서도 더 늦지 않은 나이에 결혼해서 다행이다는 반응이었다. 당시 주변에서는 결혼한 친구가 아무도 없었는데도. 그런데 지금도 친구들은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런 시대인 것 같다. 얼마 전 결혼 상대를 찾는 방송 연애프로그램에서 스물아홉 인 여자가 짝을 찾겠다고 나오니 ‘아니, 이렇게 어린데 벌써 결혼 생각을?’이라며 술렁인다. 법정 청년 연령을 만 39세로 상향하는 청년기본법 개정에 대한 뉴스도 흘러나온다.
시간이 흐르는 속도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 텐데, 사회는 이제 30대 후반을 두고서도 청년이라는 작위를 수여할 준비를 한다. 작위라고 하면 ‘청년’은 귀족 신분이라도 되는 것인가? 뭐, 그렇다. 청년은 좋은 것이다. 아직 때도 덜 묻어 가슴은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하고, 몸과 마음이 건강해서 활기가 넘치고, 가진 것도 없지만 잃을 것도 없는 시기다.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철이라 비유해서 ‘청춘(靑春)’이라고 불리는, 그런 좋을 때다.
이번에 찾아가는 장소는 ‘청춘’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면 더욱 가슴이 뛰는 곳이다. 10대, 20대 청년들이 같은 꿈을 품고 모여 살았던 도쿄의 어떤 아파트다. 2층짜리 목조주택에 한 층에 10세대가 들어가는 방이 있었으니 한국인의 눈에는 ‘빌라’ 아니면 ‘다세대주택’이라는 말이 더 알맞겠지만, 일본에서는 그런 건물을 ‘아파트’라고 부른다. 그래서 이름에 아파트나 여관에 붙이는 ‘장(荘·そう)’이 붙어 도키와소라고 하는 곳이다.
# 1950년대 젊은 만화가들의 합숙소, 도키와소
2층짜리 목조 아파트 도키와소 전경. 1982년 해체 후 복원되어 2020년 박물관으로 개관했다.
‘도키와소(トキワ荘)’는 일본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들어봤을 법한 이름이다. 이곳은 1952년 도쿄 도시마구 시나마치에 지어진 2층짜리 아파트인데, 건물이 노후화되어 지어진 지 30년 만인 1982년 해체되었다. 건축상으로는 특별할 것도 없는 이 오래된 아파트는 해체되고 나서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1996년 영화 ‘도키와소의 청춘(トキワ荘の青春)’이 나오고, 2000년대에 들어서 ‘도키와소의 영웅들(トキワ荘のヒーローたち)’이라는 기념비가 아파트 앞 공원에 세워졌다. 그 청춘과 영웅들은 이름만 들어도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전설적인 만화가들이다.
도키와소에 가장 먼저 입주한 만화가는 <우주소년 아톰>으로 유명한 데즈카 오사무였다. 스물넷의 나이에 도쿄에 상경한 그는 한 하숙집에 머물면서 만화를 연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편집자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들락날락거리자 집주인은 당연히 불평을 했다. 그러자 만화잡지 출판사였던 가쿠도샤(学童社)는 데즈카 오사무에게 도키와소에 입주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때는 1953년이었으니 도키와소는 신축 아파트였다. 데즈카 오사무는 아파트에 들어가 약 반년 정도 생활했다.
비슷한 시기, 만화가 데라다 히로오(寺田ヒロオ)는 가쿠도샤의 <만화소년(漫画少年)>이라는 잡지에 연재 중이었다. 그는 도키와소의 빈방에 젊은 만화가들을 모여 살게 하면 어떨까, 하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냈다. <만화소년>을 통해 데뷔하는 신입 만화가들이 공동생활을 하면서 서로 작업도 도울 수 있고, 출판사 입장에서는 연재 일정을 관리하기도 수월할 터였다.
그리고 1954년 10월, 데즈카 오사무가 도키와소를 나가면서 그의 방에 갓 스무 살이 된 후지코 후지오 콤비가 입주했다. 나중에 <오바케의 Q타로>로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될 콤비는 2~3평밖에 안 되는 작은 쪽방이었지만 무척 감격스러워했다. 다다미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그림을 그리고 부엌과 변소도 공용인 불편한 생활이지만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여기가 데즈카 오사무가 쓰던 방이라니!’ 파릇파릇한 신인 작가인 그들은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을 보며 만화의 꿈을 키웠고, 이제 막 그와 같은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었다.
다음으로 출판사의 주재로 스즈키 신이치(鈴木伸一), 모리야스 나오야(森安なおや), 이시노모리 쇼타로(石ノ森章太郎), 아카쓰카 후지오(赤塚不二夫) 등 젊은 작가들이 차례차례 입주하게 되었다. 이름만 들어도 묵직한 일본만화계의 거장들은 도키와소에서 청춘을 보냈다. 한두 명만 배출해도 도쿄 지자체가 앞장서서 만화 성지라며 문화사업 예산을 편성했을 텐데, 이 아파트가 도시마구에서 명물이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도키와소에 살았던 만화가들에게도 ‘도키와소 출신’이라는 게 하나의 훈장이 되었다.
편집자 출신의 만화 평론가 오쓰카 에이지는 이시노모리 쇼타로의 담당이던 시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처음 편집 일을 시작했을 때, 이시노모리 쇼타로는 자신의 연재분에 대해 뭔가 의견을 말해보라고 다그쳤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고. “데즈카 오사무 다음으로 위대한 도키와소 멤버 중 한 명인 이시노모리 쇼타로”의 앞에서 신입 편집자인 그가 감히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 그 자리엔 이제 박물관이 있다
빈티지샵과 아기자기한 카페가 많아 여행자의 감성을 자극하는 시모키타자와(下北沢)에 숙소를 잡았다. 역 앞에는 밥집과 술집이 즐비한 골목길이 있어 낮보다 밤에 떠들썩한 동네다. 그래선지 아침에 문 닫은 가게 앞을 지나가면서 왠지 밤늦게까지 숨 가빴던 장사를 끝내고 너덜너덜해진 기운이 느껴진다. 흡사 다른 사람들이 금요일을 화려하게 불태우고 잠들어버린 토요일 아침, 홀로 박물관으로 출근하는 기분이다. (박물관은 주말 교대 근무가 많다)
여행지에서 아침부터 부지런을 떤 이유는 도키와소에 가기 위함이었다. 새로운 기획전시가 개막하는 첫날이라 혹시 혼잡할 것을 대비해 입장 시간을 예약해 두었다. 방법은 간단하다. 도키와소 만화 박물관 홈페이지에서 시간을 지정하고, 약간의 개인정보만 입력하면 된다. 사전 예약제를 운영한다는 건, 평소에 관람객으로 붐빈다는 의미일 텐데 어떤 사람들이 얼마나 오는지 궁금했다. 나 같은 외국인도 있는지, 연령대는 어느 정도일지 도통 가늠이 되질 않았다.
시모키타자와에서 오치아이미나미나가사키역(落合南長崎駅)까지 30분 만에 도달했다. 지하철역에서 도키와소까지 다시 걸어서 10분이다. 동네가 한적하고 오가는 사람도 많지 않다. 길거리에는 몇몇 노인만 지나다닐 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중절모를 쓴 할아버지 무리들과 같은 장소를 향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설마, 할아버지들도 도키와소에?
도키와소에 입장하고 나니 확실해졌다. 외국인은 없다. 그리고 대부분 관람객은 흰머리가 성성한 노인들이었다. 어떤 할머니는 혼자 방문해서 전시 패널에 적힌 글자를 하나도 빠짐없이 공책에 적고 있었고, 어떤 할아버지들은 세 친구가 함께 와서 만화가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걸었다. 하하, 할아버지도 이런 곳엘 오시네…. 생각하다가 아뿔싸! 싶었다. 나도 모르게 만화책은 젊은 세대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이들도 1950~6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도키와소에 살던 만화가의 작품을 즐겨 읽었을 것이다. 그리고 만화가들이 평생을 만화가로 살았듯, 노인들도 지금까지 만화를 좋아할 수도, 추억할 수도 있다. 왜 그런 단순한 사실을 알지 못했을까?
도키와소는 1982년 해체되었지만, 지역민들의 서명운동과 도시마 지자체에서 실시한 도키와소 활성화 방안 등 연구 프로젝트에 힘입어 2020년 박물관의 모습으로 다시 탄생했다. 도키와소를 재건하면서 박물관은 옛날 사진과 해체 당시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해 최대한 옛 모습을 그대로 복원하려 애썼다. 그 결과, 이중으로 된 벽구조물, 공동 부엌의 가스화로, 삐걱거리는 계단까지 고증하여 재현했다. 그리고 2층은 만화가들이 살던 시절처럼 다다미방과 복도를 꾸며놓았고, 1층은 기획전시실로 만들었다.
도키와소 특별기획전시 포스터
2층 전시를 돌아보고 난 뒤, 1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계단으로 올라가 엘레베이터로 내려가는 강제동선이다) 1층의 기획전시는 이시노모리 쇼타로와 아카쓰카 후지오의 우정에 대한 내용이다. 두 사람은 물론이고, 도키와소에 살던 만화가들도 대부분 사망했다. 아직 생존해 있다 하더라도 여든, 아흔이 넘은 노인이다. 그들의 얼굴을 떠올려보면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오른 후니까 나이 든 모습이다. 그러니 기획전시 포스터를 보고 깜짝 놀랄 수밖에! 젊고 심지어 귀엽게 생긴 청년들이다. 이게 이시노모리 쇼타로라고? 폭탄 맞은 듯한 헤어스타일의 그 이시노모리 쇼타로? 그 옆에는 뱃살이 하나도 없는 아카쓰카 후지오라니! 청춘은 참 무섭다.
# 당연히, 그들에게도 청춘은 있었다
이들은 가장 청춘답게 도키와소 시기를 보냈던 작가들이다. 이시노모리 쇼타로는 열여덟에, 그보다 3살 나이가 많은 아카쓰카 후지오는 스물하나에 도키와소에 입주했다. 비슷한 시기에 들어와 다시 비슷한 시기에 이사를 나간 이들은 1956년부터 1961년까지 무려 5년을 도키와소에서 함께 살았다.
두 사람이 인연을 시작하게 된 이야기는 기획전시에 잘 설명되어 있다. 어릴 때부터 만화가를 꿈꾸던 이시노모리는 ‘동일본만화연구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회원을 모집했고, 아카쓰카가 이에 지원하면서 처음 만나게 되었다. 둘에게는 동시에 만화가로 데뷔하는 행운도 따랐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카쓰카는 이시노모리가 혼자 사는 아파트에 찾아갔다. 그런데 이시노모리는 빈속에 칼피스(일본의 유산균 음료 브랜드)를 마시고 쓰러져서 복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자취하면서 제대로 먹지도 않고 생활이 엉망진창이었던 탓이었다. 그래서 아카쓰카는 이시노모리에게 함께 도키와소에 들어가 공동 하숙을 하자고 했다.
도키와소에는 젊고 가난한 만화가들이 한 방씩 차지하며 살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다행히 아카쓰카의 어머니가 있어서 오며 가며 밥도 지어주고 빨래도 해주었다. 아카쓰카의 동료 만화가들은 모두 그의 어머니에게 신세를 졌던 모양이다. 아카쓰카와 이시노모리는 목욕탕에 갈 돈이 없어 공용 부엌 싱크대에서 몸을 담그는 기행도 저질렀다. 만화로 그려놓으니 귀여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카쓰카의 어머니에게 등짝을 맞았을 것 같다. 도키와소의 공동합숙생활은 작품에도 영향을 미쳐서 합작만화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이시노모리와 아카쓰카는 미즈노 히데코까지 셋이서 ‘유마이아(U·マイア)’라는 필명으로 <어둠 속의 천사(くらやみの天使)>와 같은 작품을 남겼다.
도키와소에 사는 만화가들에게 밥을 지어준 아카쓰카 후지오의 어머니
공동 부엌에서 목욕을 하는 이시노모리와 아카쓰카
5년 후, 이시노모리와 아카쓰카는 도키와소를 나왔다. 그 연유에 대해 전시패널에 적힌 정보나 인터뷰는 없었다. 하지만 젊은 작가가 성장하면서 독립하는 건 순리일 것이다. 아카쓰카는 퇴소 이후 1962년 <오소마츠군(おそ松くん)>, 1967년 <천재바카본(天才バカボン)> 작품을 잇달아 히트하면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이시노모리는 변신물의 대가가 되어 1964년 <사이보그 009>, 1971년 <가면라이더> 시리즈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두 작가 모두 일본을 대표하는 만화가가 되었다. 그리고 각각 1998년, 2008년 세상을 떠났다.
20대가 지나고 나니 이제야 보인다. 청춘은 바보 같아도 귀여워 보이고, 돈이 없어도 못나서 그런 게 아니라 당연하고, 몰두할 일이나 친구만 있으면 그냥 그대로 괜찮은 것이다. 그리고 가끔 돌아본 청춘이 반짝반짝 빛난다는 건 더 이상 그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고 조금 더 마음의 여유가 생긴, 30대여서이지 않을까. 40대, 50대가 되고 나면 지금의 시기도 ‘참 어렸지, 그때’라며 회상할지도 모르겠다. 어디, 1020 말고 3040에 대한 박물관은 없나?
[끝]
※ ‘이시노모리 쇼타로와 아카쓰카 후지오, 두 사람의 인연(ふたりの絆 石ノ森章太郎と赤塚不二夫)’ 특별기획전시는 2024년 3월 24일까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