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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활보 May 17. 2022

내 책이 나왔는데 왜 그렇게 수줍었을까

글쓰는 태도라는 것

2011년 내가 쓴 책이 서점에 깔렸다. "첫 책"이라고 쓰고 싶지만 두 번째 책이 기약없기에 그냥 "책"이라고만 적는다. 요즘은 책이 나오면 작가들이 직접 발로 뛰면서 SNS 홍보도 하고 막 그러던데, 나는 아주 친한 지인들에게만 출간 소식을 알렸다. 그것도 엄청 부끄러워하며. "나 책 냈어! 읽어봐줘!"가 아니라 "아니~ 어쩌다 보니 책을 내게 되었어. 그냥 그렇다구" 식의 보고였다.


책이 나온 것을 당시 다니던 회사에도 감추었는데, 선물하려고 작가증정본에 메모를 하다 그만 들켜버리기도 했다. 가장 난감한 건 사인을 요창받을 때였다. 저기요, 사인이라뇨. 지금은 생각나지도 않는 문구를 적고 내 이름을 썼을 때, 그 책의 소재였던 그 여행에서 만난 벼룩이 온 몸을 기어다니는 느낌이었다.


기쁨이 부끄러움을 이기는 순간들도 있었다. 책을 발견해 읽어주는 사람들을 내가 발견하고 그들의 소감을 들을 때. 이메일로 전해진 독자의 소감 같은 것들. 후배가 "지하철에서 언니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을 봤어요" 했을 때. 대형서점에 내 책이 무려 누워 있는(!) 사진을 받았을 때. 작은 출판사에서 출간했기에 이벤트나 홍보는 생각도 못했는데 순전히 인터넷서점 MD가 가진 호감 덕에 메인 페이지에 걸렸을 때도 "와 더 많은 사람들이 책을 발견할 수 있겠다" 싶었다.


라디오에 출연했을 때는 책을 내준 출판사 사장님에게 보은하는 마음으로 임했다. 몇 권이라도 더 팔리면 사장님께 도움이 되겠지 하며. 쫄보임을 감추느라 청심환을 먹어가며. 회사 동료가 녹음파일을 주었는데 여태 한 번도 듣지 못했던 걸 보면 정말로 나는 책을 쓴 내가 부끄러웠던 게 맞다. 누군가가 나를 작가라고 부를 때 가장 많이 한 생각은 '내가 무슨 작가라고'였다.




왜 그토록 부끄러웠을까? 그건 소설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무릇 작가라면 소설가지! 에세이는 읽지도 않았다. 실용서, 특히 자기계발서는 혐오했다. 지금은? 가장 많이 읽는 것이 에세이고 온갖 종류의 실용서(이를테면 시간쓰기/메모하기/생산성 향상을 다룬 자기계발서, 미니멀리즘과 관련한 온갖 고증서, 집꾸미기부터 텃밭꾸리기, 이유식까지)를 섭렵하는 중이다.


내게 소설읽기는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내가 사라지는 행위다. 다른 건 몰라도 머릿속으로 그리는 능력은 만렙이어서 소설 속 주인공의 옷주름 하나하나까지도 상상할 수 있다. 그 안에서 주인공이 되었다가 작품의 배경인 호수나 낡은 아파트가 되었다가 울었다가 웃었다가 하다 보면 현실의 나는 온데간데 없다. 하지만 아이를 돌보면서는 그런 몰입의 경험은 욕망하면 안 될 무언가였다. 흐름 끊긴다고 아이를 원망할 순 없으니 내가 소설을 끊어야 했다. 하지만 에세이가 지닌 일상에서 길어올린 단정한 문장들, 작은 발견들, 빛나는 재치 같은 것들은 특별한 상상 없이도 흐름이 끊겨도 다시 집중할 수 있었다.


지금 나의 포즈로는 당췌 상상할 수 없지만, 책을 쓸 당시의 나는 계속 책을 쓰며 살 줄 알았다. 그 책에 담지 못한 이야기가 많았으니까. 그런데 아니었다. 책 출간을 하나의 '이벤트'로 만들어버린 부끄러움은 스스로를 "쓰는 사람"으로 정체화하지 않게 했다.


이벤트는 멋지다. 어쨌든 내가 쓴 책을 가졌으니까. 그런데 그걸로 끝. 이벤트가 끝나면 다시 일상이다. 지금에서야 이런 생각이 든다. 이벤트 한 번으로 끝내지 말고, 글 쓰는 걸 하나의 태도로 삼아 잘 갖고 있어 볼 걸. '작가'라는 호칭이 부끄러우면 책 내는 사람 말고 글 쓰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쭉 붙들고 있을 걸. 브런치를 통해 이렇게 많은 작가들이 탄생하고 그들의 멋진 글을 읽을 수 있는 날이 올지 그땐 몰랐다.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아서다. 나를 알아가는 글쓰기는 죽을 때까지 유효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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