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여행을 떠난다 - 준비(2)

우리에겐 소중한 물건들

by 민은 민들레

짐을 비우고 나니 이제 새로 구매할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아무것도 사고 싶지 않았다. 한창 물건들을 팔면서 날마다 아내가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면,


"나 오늘 이거 팔고 20만원 벌었어!"

"나 오늘 물건 3개나 팔았다!"


하며 아내에게 중고장터에서 이룬 소소한 승리들을 선포하던 때라 괜히 지금껏 열심히 이루어놓은 성취를 깎아먹는 기분이 들었다. 집주인에게 넘긴 가구들을 포함해서 이래저래 판 물건 수익이 월급 수준이 되었고, 미니멀리즘의 여파를 겪으며 매일 "이 만큼 팔았는데 생활에 불편한 게 없어!"를 남발하다 보니 마치 이 수치를 줄이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그래도 생에 한번 갈만한 여행에 아쉬움이 남으면 안 되니 다시 지갑을 열기로 했다. 1년 정도를 캐리어 가방 두 개로 (각 하나 씩) 살려면 도대체 뭘 넣어야 하는 거지? 뭘 챙겨야 최소한으로 살면서 불편하지 않을까? 막연한 걱정에 아무것도 챙기지 못하고 한동안 고민만 하게 되었다.


그래도 물건을 팔면서 우리 삶에 가장 중요한 것들이 뭔지 알게 되었고, 그것을 토대로 뭘 사야 할지 하나둘 정리해볼 수 있었다. 크게 분류하자면 3가지로 나눠지더라.


1. 생존에 필요한 것들 - 옷, 돈, 일을 할 수 있는 노트북, 아내가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화장품 몇 가지.

2. 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것들 - 필수품을 관리하거나 장기적으로 돈을 절약시켜주는 아이템들.

3. 하고 싶은 것들 - 나는 악기, 아내는 플래너. 스케이트보드와 사진을 찍을 아날로그 카메라.


옷을 왕창 처분하는 과정에 정말 아깝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당연히 나보단 아내에게 더욱 힘들었을 것이고, 옷을 챙기는 것 자체도 더욱 곤란했을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1년 동안 이렇게 살려면 옷은 결코 다채로울 수가 없다.


나는 가을 코트 한 벌, 윈드브레이커랑 얇은 캐시미어 스웨터 두벌, 그리고 티셔츠 몇 벌을 챙기고 공항에 잠바, 긴팔, 그리고 청바지를 입고 갔다. 아내는 스웨터 두벌, 얇은 드레스 몇 벌과 청바지, 티셔츠, 그리고 스타킹만큼은 완벽하게 맘에 드는 걸 찾기 극히 어렵다며 몇 벌 새로 사서 챙겼다.


여행을 다니며 일을 해야 하기에 한국에서 반 공수해간 데스크톱을 처분하고 노트북을 장만하고, 도난방지를 위해 켄싱턴 잠금쇠를 장만했다. 유럽엔 켄싱턴 락이 비싸서 심지어 미국 아마존에서 시켰다. 전에 켄싱턴 락을 쓰는 사람들을 보면 '뭘 저렇게 유난을 떨까' 싶었는데 (한국에선 솔직히 필요 없다고 본다) 도난에 의해 하루라도 일을 못 하게 되는 것보단 유난을 떠는 게 낫다고 결론을 내렸다.


연애 초창기 때 장인어른이 내 존재를 처음 알게 된 후, 생일선물을 사주고 싶어 하셨다. 그때 제시하신 게 딱 우리 아빠가 생각했을 법한 선물, 스위스 빅토리녹스 다용도 칼. 다용도 칼 사랑은 만국 공통인가 보다. 어찌 유라시아 대륙 반대편에 사는 아버지 두 분께서 피부색은 달라도 생각이 이리 같을 수 있을까. 당시엔 필요 없다고 정중히 거절한 선물을 혹시 올해 생일로 받아도 되겠냐고 여쭤봤다. 그렇게 나도 열쇠에 다용도 칼을 꼽은 아저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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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바보 같지만, 우린 웬만한 여행자들이 가지고 다니지 않을 법한 것들도 넣었다. 첫 번째는 oodie 플리스 옷. 정말 어마어마한 공간을 차지하는 털 옷 그 자체. 라트비아의 추운 날들을 버티게 해 준 고마운 옷이지만 과연 이걸 가져가야 할까?라는 질문을 서로 한 달 동안 던졌다. 결국 난방이 안 좋거나 이불이 얇은 경우엔 비상 이불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논리로 캐리어의 반을 oodie 옷으로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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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어마하게 따듯하지만 어마어마하게 두껍고 무거운 oodie.


우리는 다른 장기 여행자들처럼 계속 움직이는 게 아니기 때문에 한 곳에 머물면서 그 도시를 깊게 체험하는 게 목적이다. 하지만 매일 같은 곳에서 1-2시간 걷는 정도론 해봐야 5 킬로미터 반경 이상 체험하기 힘들기에, 캐리어에 들어가는 이동수단을 마련하고 싶었다. 그래서 미니 롱보드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마찬가지로 유럽에선 구하기 어려워 미국 아마존에서 직구를 했다. 일반 보드보다 작아서 캐리어에 들어가고, 롱보드 특성상 바퀴가 커서 타기가 쉽고, 돌길이 많은 유럽 도심 특성상 언제든지 들고 다닐 수 있을 만큼 가볍다...라고 생각했으나 가볍진 않았다.


막상 배송이 오고 나서 처음 타러 나가려니 30대에 무슨 보드야... 하면서 머뭇 거렸는데, 마침 그때 60대는 되어 보이는 백발 할아버지가 롱보드를 타고 골든 레트리버를 산책시키시며 지나갔다. 그렇게 출발하기 전 1-2주간 열심히 보드를 연습하고 나니 처음 타는 나나 아내나 금방 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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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이 정도 사이즈 되는 걸 찾기 매우 매우 어려웠다.


마지막으론 아날로그 카메라. 아내가 올해 생일 때 아날로그 감성에 꽂혀서 소련제 아날로그 카메라를 사줬다. 현지엔 소련제 물건이 많아서 그중 맘에 드는 카메라를 골랐는데, 이게 70년대 물건이다 보니 어마어마하게 무거웠다. 대략 2킬로 정도 되는 것 같은데, 확실히 카메라는 무거우면 안 들고 다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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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트 B. 그래서 과감하게 다시 팔려했으나... 허허. 골동품을 되파는 건 쉽지 않구나.


그래서 상대적으로 덜 오래된 카메라, LOMO LC-A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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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제니트 B를 들고 핀란드-에스토니아를 갔을 때 필름이 안 돌아가서 그 무거운 무쇠를 들고 다니며 열심히 찍은 사진을 다 날렸기 때문에 이번엔 충분히 테스트를 하고 가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필름 3통 정도 찍고 나니 조금씩 감성적인 사진을 인화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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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가의 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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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회사 동료들


마지막으로, 집에 있는 악기들을 대부분 처분하고 그걸 '미니' 악기들로 대체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충분한 테스팅은 성공의 지름길이기에, 짐을 싸서 카페에서 음악을 만들어도 바리스타들에게 살해당하지 않는지 실험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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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 악기로 음악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중요한 건 바리스타에게 쫓겨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비운 살림을 다시 채워버렸다. 그리고 20킬로 체크인 중량에 맞춰 짐을 쌌다.


공항에 가니 딱 이렇게 나오더라.


캐리어 1 - 19.5 키로

캐리어 2 - 19.7 키로

기타 가방 - 11 키로

백팩 1 - 5 키로 (노트북, 아이패드)

백팩 2 - 4 키로 (카메라, 외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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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1일, 집 열쇠를 집주인에게 반납하고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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