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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은 Aug 29. 2022

헤어지는 일 (더 사적인 버전)

Parting (private ver.)

1


내 첫 번째 이별은 내가 도망쳤다. 당시 K는 나를 많이 좋아했는데, 나는 그런 K에게 줄 마음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시작했다. 알고 있다. 완전히 나의 잘못이라는 걸. 아마 새해 신년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가족과 함께 있느라 답장이 느린 것처럼 굴다가 결국 그날 밤 헤어지자고 말했다. 잘 쉬고 있냐는 K의 말에, 답장이 늦었지 사실 가족이랑 있느라 답장 늦은 거 아니야… 사실 나 못 만나겠어. 더 만날 자신이 없어. 시작해서 미안해. 마음이 생길 줄 알았어. 만나서 얘기해도 되고 나 꼴 보기 싫으면 그냥 이렇게 끝내도 돼,라고 말했다. K는 그렇게 오래지 않은 시간에 답장했다. 기다리겠다고.


답장을 하지 않고, K가 줬던 꽃을 버렸다. 그리고 작은 뱃지를 버리고 기억이 나질 않는데 무언가를 또 버렸다. 그리고 사진을 삭제하고, 연락처를 삭제했다. 그렇게 K와는 이별했다. 이별이란 건 이상했다. 이별을 했는데 쓰레기통에 있는 사용된 콘돔이 이상했고, 아직 K의 냄새가 나는 침대가 이상했다. 정말 얼마 전까지 옷 다 벗고 섹스한 사람이랑 이제 인사도 하면 안 되는 사이가 됐다고? 그리고 내가 그런 인간이라고 믿고 싶진 않았지만 나는 그러니까, 만나서 얘기하지 않고 문자로 이별을 통보한 예의 없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물론 K에게 ‘만나고 싶으면 만나도 되고, 꼴 보기 싫으면 안 만나도 된다’라는 선택지를 주기는 했지만 그것 또한 비겁한 방법에 불과했다. 아마 K에겐 최악의 연애 상대로 등극했을 것 같다.


혹시 그래서 K 저주를 걸었을까. 나는 그다음부터 줄줄이  같은, 아니 나보다  심한 남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나를 내키는 때에만 사랑해줬다. 그래서 데이트를 하기로   근처가 돼도 어디를 갈지,  할지 같은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그들이 싫어할  같았다. 그래서  데이트 당일, 데이트 장소에 애인이 도착하지 않더라도  일이 아니라고, 사랑은 이렇게 쉽게 사라지기도 하는 거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로 나와의 약속을 무책임하게 어그러트리고 떠나갔다.


어느 순간부턴 헤어지는 일이 너무 쉬웠다. 헤어지자는 말이 입에 착 감겼다. 반면 사랑한다는 말은 목구멍에 틀어 막혀서 절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삶을 내가 원했던가? 계속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가? 분명 아니다. 헤어지잔 말만 잘하면서 살고 싶었던 게 아니다. 그래서 어느 날은 그들과 찍은 사진이나 대화 내용을 빤히 쳐다봤던 적이 있었다. 정말로 그들과 내가 사귀었던 게 맞는 건가? 정말로 그들과 내가 손을 잡고 거리를 걸으며 일상을 말했던 것인가? 그런 걸 봐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내게서 사라져 버렸으니까.


2


평소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날이었다. 나는 마블이나 애니메이션 종류의 영화를 잘 보지 않는, 일종의 영화 편식을 하는데, 문득 그런 영화도 봐야 작업 스펙트럼이 더 넓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 친구는 그런 나의 다짐을 듣고 바로 디즈니 플러스 이용권을 결제했다. 그와 나의 생일이 섞인 비밀번호를 입력해 로그인을 했다.


접속하니 그는 재밌게 봤고, 나는 보지 않은 영화들이 수두룩했다. 슬라이드로 넘기다 보니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가 있었다. 이것만큼은 나는 봤고, 그는 띄엄띄엄 봐서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영화였다. 다시 본 남자 친구에게 내가 <라이프 오브 파이> 속 제일 좋아하는 장면을 말했다. 바로 파이가 작가한테 리처드 파커와의 이별을 이야기하는 장면. ‘삶이란 결국 그런 거죠. 보내는 것… 하지만 가장 가슴 아픈 건 작별인사조차 못했다는 거죠’라는 대사. 그때 갑자기 문득 마음속의 어떤 퍼즐이 맞춰졌다. 설명을 하다 말고 남자 친구한테 말했다. 잠깐만 나 글 써야겠다.


그 장면의 앞뒤 대사는 이랬다.


‘나와 함께 표류하면서 날 살게 해 준 리처드 파커는 그렇게 내 삶에서 영원히 사라졌죠. 난 아이처럼 엉엉 울었죠. 이젠 살았다는 기쁨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가버린 리처드 파커가 야속해서 가슴이 너무 아팠어요. 난 리처드 파커에게 친구가 아니었죠. 생사를 같이했는데 돌아보지도 않고… 하지만 녀석의 눈에 비친 게 결코 내 모습만은 아니었어요. 틀림없어요. 느꼈거든요. 입증은 못하지만… 삶이란 결국 그런 거죠. 보내는 것… 하지만 가장 가슴 아픈 건 작별인사조차 못했다는 거죠.’


그 대사는 나에게 이렇게 들렸다.


‘나와 함께 사랑하면서 날 살게 해 준 그는 그렇게 내 삶에서 영원히 사라졌죠. 난 아이처럼 엉엉 울었죠. 이젠 사랑이 끝났다는 비참함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가버린 그가 야속해서 가슴이 너무 아팠어요. 난 그에게 연인이 아니었죠. 마음을 나눴었는데 돌아보지도 않고… 하지만 그가 저를 바라보는 눈빛에 사랑이 없었던 건 아니었어요. 틀림없어요. 느꼈거든요. 입증은 못하지만… 삶이란 결국 그런 거죠. 보내는 것… 하지만 가장 가슴 아픈 건 작별인사조차 못했다는 거죠.’


그러니까 그들과 나는 만났다 헤어졌다기보단 서로에게 나타났다 사라진 관계에 가까웠다. 마치 파이와 리처드 파커처럼.


3


지나간 연애를 생각하면 여전히 슬프거나 씁쓸함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런 생각은 어쩐지 내가 그들에게 혹시 아직도 마음이 남아있나? 하는 이상한 생각까지 들기도 했다. 또한 영화를 처음 봤을 때도 파이가 얘기 끝에 결국 눈물을 흘리는 것에 대해서도 어떤 감정이기에 저렇게 눈물을 흘리는 건지 알지 못했다. 허나 이제 생각하니 나도 파이도, ‘이별하지 못한 헤어짐’이었기에 그랬던 게 아닐까. 다시 생각해보니 그들과의 추억이 담긴 물건을 버리고, 사진을 지우고, 연락처를 지우는 걸 헤어지는 일로 알다니. 난 정말 바보가 아닐까. K에겐 내가 파이의 리처드 파커 같이 느껴졌겠지만, K에게 함께 보낸 시간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으며 서투른 이별에도 기다리겠다고 말해줘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어쩐지 이 글을 통해 이제야 헤어지는 일을 하는 기분이 든다. 아무렴, 헤어지는 일은 여간 쉬운 게 아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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