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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은 Sep 04. 2022

사랑은 돌아가는 거야

Love goes round and round and round


*


풋풋한 고등학교 시절, 좋아했던 친구가 있었다. 용기 또는 객기를 부려 그 친구에게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다. 거절당할까 두려웠는데, 어쩐지 보기로 했다.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그날 마스크팩을 했다. 약속 날 꽃무늬 치마를 입을 생각을 하며 잠들었다.


정류장에서 보기로 했는데, 약속 시간이 돼도 그가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가 타야 하는 버스를 한 2-3대쯤 보냈을 때, 그가 도착했다.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고 했다. 나는 설레서 어제부터 잠도 설쳤는데. 그런데도 잠 못 자면 피부가 푸석해질까 자려고 노력했는데. 낯설게 서있다 오는 버스를 타고 영화관으로 이동했다.


도착하니 우리가 보기로 한 영화는 바로 입장할 수 있었는데, 좌석이 별로였다. 너무 가까이에서 봐야 했다. C열이었나, D열이었나. 게다가 약간 측면이었다. 다음 회차는 한 한 시간 정도 후에 있었고, 좌석도 좋은 데로 고를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 뜨는 시간 동안 우리가 얘기를 나누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다음 거 보자,라고 하니 그가 말했다. 그냥 이거 보자. 매표소 직원이 결정을 바라는 눈빛으로 우리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를 보다 고개를 돌려 매표소 직원에게 말했다. 지금 꺼 주세요.


그는 편안해 보였다. 그 이유는 영화를 빨리 볼 수 있어서가 아니라 빨리 헤어질 수 있어서 인 것 같았다. 영화를 보는 동안 심장이 뛰거나, 팝콘이나 콜라를 먹으면서 일어날 수 있는 스킨십이나, 서로를 위한 배려 같은 건 느낄 수 없었고, 그저 착잡했다. 그러나 착잡함은 그때가 시작이었다. 영화를 보러 나오면서 그는 아까 점심을 많이 먹어 배가 고프지 않다고 말하며, 저녁을 먹을 거냐고 말했다. 영화표는 그가 사서, 저녁은 내가 사기로 했었는데, 그러니까 그에겐 공짜 저녁이었는데 그럼에도 무르고 집에 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와 더 있고 싶어 가라고도 못하겠고, 그렇다고 가고 싶어 하는 그를 붙잡아 놓기도 애매해 우물쭈물 걷다 그가 언젠가 한 번 먹어봤다는 고깃집에 들어갔다. 고기라 구워지는 동안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먹는 중이었는데, 그에게 전화가 왔다. 그의 친구였는데 농구를 할 건데 올 거냐고 묻는 듯했다. 그는 알겠다고 했다. 전화를 끊은 그의 입에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를 보니 얼른 헤어져야 할 것 같았다. 식당을 나온 그는 할 일을 끝낸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는 웃었고, 나는 웃는 척을 했으며 그는 어딘가로 걸어갔고, 나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갔다. 돌아가는 버스에선 어떻게 하면 빨리 갈 수 있을지 고민하는 그의 모습이 자꾸 플래시백 됐다. 그날 남은 시간은 외롭다 못해 괴로웠다.


*


영화 ‘비포’ 시리즈 중 ‘선라이즈’의 낭만도 좋고 ‘미드나잇’의 무르익은 사랑도 좋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선셋’이다. 파리에서 우연히 9년 만에 재회하는 제시(에단 호크 역)와 셀린느(줄리 델피 역)가 길을 걷고 또 걸으며 이야기를 하는 영화. 딱히 어떤 사건이랄 것 없이 그저 오랫동안 쌓인 이야기들을 나누고, 서로에 대한 감정을 이야기하는 듯 마는 듯하는 그 간질간질함. 대화만 하는데도 혼이 쏙 빠졌다.


제시와 셀린느는 계속 걷는다. 제시는 비행기를 타러 공항에 가야 하는데도 걷는다. 그러다 결국 셀린느의 집까지 걷게 된다. 제시는 집에서 셀린느가 작곡한 노래 딱 한 곡만 듣고 가기로 한다. 셀린느는 기타를 들고 노래를 시작한다. 그러나 노래가 끝나고도 제시는 일어나지 않는다. 셀린느가 음악을 틀고 살랑살랑 춤추는 모습을 그저 사랑스럽게 바라본다. 그런 제시에게 셀린느가 말한다.


- 자기, 이러다 비행기 놓쳐 (You are gonna miss that plane)


- 알아 (I know)


순간 마음이 멈추는 듯했다. 셀린느를  순간이라도  보려는 마음. 어쩌면 공항에 급하게 갔을, 혹은 비행기를 놓칠  알면서도, 셀린느를    수만 있다면 무엇도 상관없었을 제시의 마음사랑이 아닌 단어로는 설명이 안될  같다.

 



언젠가 스치듯 들은 ‘사랑이 로맨틱한 건 합리를 따지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이 떠올라 사람들과 ‘누군가를 사랑해서 난 이거까지 해봤다’하는 걸 이야기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중 제일 많이 나온 것은 돌아가는 것이었다. 우연을 가장하기 위해서 원래 가던 길 아니라 다른 길을 택하는 것,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기 위해 지름길이 아니라 빙 돌아가는 길을 택하는 것. 그 경험은 정도의 차이일 뿐 누군가를 좋아해 봤다면 한 번쯤은 겪어봤을 것이다.


옛 드라마에 ‘사랑은 돌아오는 거야’라는 대사가 있다. 그 대사는 드라마 스토리와 연결되는 표현이지만, 우리의 일상 버전으로 빗대어 말해보면 사랑은 ‘돌아가는’것 같다. 공항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설령 비행기를 놓치더라도 골목길 한 블록 한 블록을 더 걸었던 제시처럼, 고등학교 시절 추운 겨울에 검정 스타킹도 아니고 살색 스타킹에 꽃무늬 치마를 입고도 그와 돌아 돌아 오래 걷길 바랐던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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