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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은 Oct 05. 2022

<토이 스토리> - 하는 사랑 (더 사적인 버전)

The love I do (private ver.)



내쪽에서만 좋은 연애를 했던 적이 있었다. 생각해보면 시작부터 그랬다. 그는 자신이 연락을 잘하는 스타일이 아니라고 했고, 한 번 잠들면 어지간해선 누가 깨워도 깨지 않는다고 했다. 그걸 들으면서도 나는 그저 행복했다. 내가 그의 애인이 되고, 그가 나의 애인이 된다는 사실이 기쁘기만 했다. 그를 너무 좋아해서였을까. 그의 미소 한 번에 마음이 녹고, 그의 무표정 한 번에 마음이 무너졌다. 길을 걸으면서, 밥을 먹으면서, 심지어는 자면서도 그의 눈치를 봤다. 그가 여자인 친구들을 만나러 갈 때면 불안해졌고, 친구들을 만나는 날에는 나를 만나는 날보다 행복해 보여서 힘들었다.


그런 나에게 <토이 스토리>는 그렇게 애걸복걸하며 사랑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였다. 첫 에피소드부터 그랬다. 첫 사건은 장난감들의 주인인 앤디의 생일이다. 장난감들은 바짝 긴장한다. 그리고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 듯(아마도 매년 생일마다 해온 일인 듯) 능수능란하게 분담하여 앤디의 생일 파티 상황을 엿본다. 그 이유는 바로 앤디가 자신의 상위 호환인 장난감을 선물 받아 자신이 대체될까 봐. 그래서 앤디와 헤어질까 봐. 그 모습은 그가 만나러 가는 여자인 친구들이 나보다 외모적으로 혹은 능력적으로 더 나은 사람인지 SNS 따위로 확인해보고, 혹시나 이 사람과 한눈에 사랑에 빠질까 봐 불안해하던 내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또한 3편에서 어쩌다 탁아소에 가게 된 장난감들은 우디를 제외하고는 앤디의 곁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탁아소에 남기를 선택한다. 탁아소는 애들이 항상 놀아주고, 애들이 다 자라면 새로운 애들이 또 오니 버려지거나 잊힐 일 따윈 없는 곳이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주인이 없으면 슬플 일도 없으니까. 장난감들은 탁아소를 선택한다. 하지만 우디는 계속해서 앤디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우리는 앤디의 장난감이라고 말한다. 앤디밖에 모르는 우디의 굳은 사랑을 보면서는 온종일 그의 사랑만 기다리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에게 받는 사랑이 너무 특별했다. 하지만 그에게도 내 사랑이 그렇진 않았던 거 같다. 그는 나와 헤어질 수 있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헤어지자고 했다. 물론 난 그러지 말자고 애걸복걸했지만, 우린 헤어졌다. 그리고 한동안은 그냥 아무나 만났다. 아무나 날 놀아주기만 하면 됐다. 어차피 사랑을 받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그런데, 정말 그러면 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그런 상황이 반복될수록 내 안에선 진실된 사랑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진짜 사랑을 받고 싶었다. 잠깐만 날 놀아주고, 재미만 보는 거 말고 날 소중히 대해주고 꾸준히 사랑해주는 게 필요했다. 따라서 계속해서 주인이 있기를 소망하는 장난감들의 마음을 모를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장난감들이 애처로운 건 사실이었다. 사랑받는 데 중독되고, 사랑받아야만 이어지는 삶. 그건 누군가가 나를 사랑해주지 않으면 나를 사랑할 수 없었고, 그런 마음에 누구라도 만나야 했던 불안한 시절의 나와 닮아있었다.


이러나저러나 장난감들과 앤디에겐 필연적인 헤어짐이 있었고, 장난감들은 그 이별을 미리 선수 쳐 ‘보니’에게 가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장난감들과 앤디는 이별한다. 그렇다면 다시 장난감들은 사랑받으니까 해피엔딩인 걸까? 그렇다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나로 생각하면 그냥 그와 헤어지고 새로운 남자 친구를 만나는 정도의 상황일 뿐이다. 그게 해피엔딩일까? 실제로 그와 헤어지고 얼마간은 힘들었지만 어쨌든 또 남자 친구가 생겼다. 새로운 남자 친구는 그보다 나에게 훨씬 더 잘해줬고 다정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도 어느 순간부터 나에게 사랑을 주지 않았다. 전 애인에게 체득한 탓에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를 바로 단념할 수 있었다. 세상에 남자는 많으니까. 날 사랑해 줄 남자는 분명 또 있으니까. 난 그 사실을 알게 됐으니까.


다행히 영화의 엔딩은 따로 있다. 시리즈의 마지막인 4편은 보니의 집에서 시작된다. 앤디에게 최애 장난감이었던 우디는 보니에게선 먼지 구덩이 신세가 된다. 그럼에도 우디는 보니의 곁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쓴다. 어린이집 첫날을 긴장하는 보니를 도와주기 위해 우디는 보니의 가방에 몰래 잠입한다. 덕분에 보니는 어린이집에서 일회용 포크로 장난감 ‘포키’를 만들어낸다. 그렇지만 포키는 장난감의 운명을 거부하고 계속해서 자신을 쓰레기라고 생각하며 도망친다. 보니는 포키를 찾고, 포키는 도망친다. 우디는 포키를 찾으러 떠난다.


그 길에서 우디는 오래전에 앤디의 집에서 앤디의 여동생 몰리에게 버려졌던 ‘보핍’을 만난다. 보핍은 그간 주인이 없는 바깥 생활에 완벽히 적응한 상태였다. 드레스 따윈 집어던지고 이곳저곳을 뛰어다닌다. 그런 보핍은 꽤나 멋있어 보인다. 우디는 보핍에게 설렘을 느낀다. 우디는 그간 바깥 생활을 마스터한 보핍의 조언을 따라 포키를 찾아낸다. 우디는 찾아낸 포키를 보니의 곁으로 보낸다. 그리고 정작 우디는 보니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보핍의 곁에 남는다. 이게 토이 스토리의 엔딩이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에서는 이런 구절이 있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는’, 곧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한다. 그들에게 사랑의 문제는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사랑스러워지는가 하는 문제이다. /


우디를 포함해 장난감들은 사랑을 받지 못하면 자신의 쓸모가 다했다고 생각한다. 그 의미를 더 확대해보면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곧 존재의 의미를, 나아가 삶의 목적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장난감들이 쓸모없는 쓰레기인가? 앤디의 곁도, 보니의 곁도 아닌 곳에서도 우디의 삶은 이어진다. 왜냐면 우디가 더 이상 ‘받는 사랑’이 아니라 ‘하는 사랑’을 택했기 때문에.


나에게도 엔딩이 따로 있다. 사랑받고 버림받기를 반복하던 나는 한동안은 이성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 내가 충분히 예쁘지 않거나, 매력이 없거나,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나를 사랑해주는 남자 친구들 없이도 내 삶은 이어졌으며,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받는 사랑’이 아니라 ‘하는 사랑’을 하고 있었다. ‘하는 사랑’은 비로소 정말로 사랑을 알게 되는 기분이 들었고, 여태의 삶과 분명 다른 기분이 들었다.


토이 스토리 4편은 시리즈의 마지막 편이다. 허나 4를 보면 왠지 ‘마지막’이라는 느낌보다는 ‘또 다른 시작’이라는 느낌이 든다. 우디에겐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그건 우디가 바깥 생활이라는 새로운 생활 방식을 선택한 탓도 있겠지만 그 아래엔 사랑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곧 새로운 삶, 이라는 걸 아마 영화가 은유적으로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우디의 삶엔 더 이상 주인이 필요 없다. 그건 ‘사랑받는 삶'이 아닌 '사랑하는 삶’을 선택했기 때문이며, 이건 비단 장난감들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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