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뭐? 글을 쓰고 책을 낸 이후 내가 나에게 제일 많이 했던 말이다. 그래서 뭐? 책을 냈는데 그래서 뭐? 뭐가 달라졌는데? 힘들고 슬픈 걸 글로 적어서 뭐가 어떻게 됐는데? 상처 너만 받아? 너도 상처 주잖아. 너 혼자 고결한 척하고 사는 거 떳떳해? 나는 나에게 묻고 물었다. 끝과 답이 없는 질문에 어느덧 표정이 어두워져 있으면 사람들은 말했다. 왜 네가 얼마나 대단한데. 일하면서 대체 어떻게 글을 쓰냐. 진짜 멋있어. 그러면 나는 ‘그런가’ 같은 텅 빈 말을 하며 애써 대화가 끝나길 바랐다.
글을 쓴다는 사실을 숨겼던 대상은 보통 나보다 어른인 사람들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어른인 사람들에게 왠지 그 말을 들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뭐?라는 말. 네가 글을 쓰는데 그래서 뭐? 그렇구나 네가 글을 쓰는구나. 근데 그래서 뭐? 그래서 네 인생은 어떤데? 같은 말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될 수 있는 만큼 숨겼다. 사실이 드러날 그날에 겸손하고 부끄러운 모습으로 대견한 어린애가 되기 위해 숨기고 또 숨겼다.
그중 처음으로 알게 된 사람은 교수님이었다.(이하 선생님. 대학 때 우리는 교수님이라는 호칭을 쓰지 않았다.) 대학 때 나는 선생님의 한마디 한마디가 어려웠다. 학기가 거듭될수록 패기와 열정은 식어갔고 점점 무기력해지며 사실상 강의실에 앉아있는 유령에 가까웠다. 선생님은 나같이 소극적인 애들을 대하는 것에 어느 정도 이물감이 있으셨던 기억이고 나는 대학 내내 그 투명한 막을 깨버리고 싶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저 유령인 상태로 졸업했다.
졸업 후 사회생활을 하고 작업을 하면서는 대학 시절이 자주 떠올랐다. 후회스러웠다. 같이 수업을 들었던 동기들한테도 미안했지만 무엇보다 선생님에게 죄송했다. 텅 빈 눈동자와 멍청한 눈빛을 하고선 입을 여는 족족 미련한 대답을 했던 나.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내 인생에 어떤 순간도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그 순간만큼은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돌아가서 조금만 더 잘하고 싶었다.
그러다 선생님을 만나 뵌 건 졸업하고 7년이 지난 후였다. 내가 용기 낸 건 아니었고, 넉살 좋은 동기 오빠가 잡지를 만들어 나와 선생님에게 주기 위해 셋이 같이 보자고 했다. 고민스러웠다. 가도 될까. 이제야 찾아가는 게 맞을까. 그래도 내심 그 제안이 반가웠다. 못 이기는 척 그러겠다고 했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뵙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
태연한 척했지만 선생님의 굳게 닫힌 연구실 철제문 앞에서 심장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이윽고 문 손잡이가 움직였다. 선생님이 보였다. 선생님은 숨겨지지 않을 정도로 미소를 띠고 계셨다. 그 미소에는 부드러움이 가득 담겨있었다. 선생님의 맞은편에 앉았다. 선생님에게 내가 쓴 소설집을 드렸고, 그간의 삶을 되도록 깔끔하고 정리된 언어로 압축해 말했다. 내가 느낀 게 맞다면 선생님은 얘기하는 내내 나를 보며 눈빛으로 말씀하셨다. 네가 무엇이어도 상관없지만 이렇게 잘 지내줘서 뿌듯하다,라고.
우리는 우리의 근황으로 시작해 학교의 근황, 알고 있는 동기들의 근황을 이야기했다. 그러면서도 선생님은 계속 내가 배가 고프진 않은지, 뭐가 먹고 싶은지 같은 것들을 확인해 주었다. 우리는 나가서 인도 음식을 먹으러 갔다. 그곳에서 선생님은 나에게 맥주를 따라줬다. 선생님이 따라주는 술이라니. 그런 영예로운 순간에 동기 오빠가 사진을 찍어줬다. 사진을 보고 또 봤다. 마음 같아선 그 사진을 크게 현상해 액자까지 끼워 집에다 걸고 싶을 정도였다.
그날은 나에게 너무도 깊이 각인되어 이후 2주 정도는 만나는 사람마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선생님이 있는데… 졸업하고 7년 만에 찾아뵀거든…?‘라고 말하며 선생님과의 하루를 표현하고 또 표현했다. 삶의 어느 시점부터 나는 타인이 나에게 무감하면 다행이고, 보통은 나를 싫어하는 쪽에 가까울 거라고 생각해 왔다. 어떤 일 때문에 그렇게 된 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작은 일들이 쌓여 그렇게 됐던 것 같다. 그러다 아주 오랜만에, 누군가를 아무 목적 없이 기특해하고, 무해하게 사랑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런 일이 내 인생에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 또한.
최근에 나는 나의 20대를 돌아봤다. 20대의 나는 천장이나 벽 따위를 보다가도 눈물을 왈칵 쏟아내고, 아무 말도 못 해 끙끙 앓기도 하고 어떤 식으로든 화를 표현하는, 그러니까 나도 나를 통제할 수 없는 날을 보냈다. 그러던 나의 마음이 어떤 순간에 풀렸는지 돌아보면 거기엔 분명히 선생님이 있다. 그해 연말, 나는 선생님에게 한 해 동안 가장 잘한 일은 선생님을 찾아뵌 일이고, 선생님 덕분에 마음이 많이 풀렸다고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나의 따뜻한 마음이 너무 고맙다고 답하셨다.
그럼에도 여전히 노트북에 저장된 내 글을 보고, 서점에 깔린 내 책을 보고도 ‘그래서 뭐?’라고 할 때가 있지만, 이제는 그 뒤에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쓰자. 그래도 살자. 뜬금없이 이 여름에 웬 감상 어린 글을 쓰나 싶을 텐데, 최근에 원고를 끝내서 그런 듯하다. ‘네가 무엇이어도 상관없지만 이렇게 잘 지내줘서 뿌듯하다’는 그 눈빛. 아무래도 선생님이 문을 열어주시던 그날, 내 마음 깊은 곳의 문도 열린 게 틀림없다. 그래도 쓰고 싶고, 그래도 살고 싶어 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