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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은 Jul 21. 2023

<단지 세상의 끝>


난 널 이해 못 해


만약 누가 이렇게 말한다면 어떨 거 같아,라고 친구들에게 물었다. 슬플 거 같아. 아무렇지 않을 거 같아. 이제는 만나지 말자는 것 같아. 누가 이해해 달랬나. 어쩌라는 거야 까지. 나 또한 누군가 나에게 저 말을 한다면 아마 ‘우리 서로 그만 노력하자’라는 의미로 받아들였을 것 같다. <단지 세상의 끝>을 보기 전까지는. 


12년 만에 집에 온 루이(가스파르 울리엘 분)에게 앙투안(뱅상 카셀 분)은 시종일관 빈정대고, 쉬잔(레아 세이두 분)은 동경과 설렘을 느끼며, 엄마(나탈리 베이 분)는 루이에게 잘 보여야 된다며 막 바른 매니큐어를 분주하게 드라이기로 말린다. 가족들은 모두 각자로 보인다. 각자의 태도, 각자의 취향, 각자의 행동을 하는 사람들. 시종일관 불협화음을 내는 가족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루이를 환영하고, 원망한다. 


한 식탁에서 밥을 먹을 때도 그들은 저 하고 싶은 말만 한다. 우리네 명절날 일어나는 일이 저 멀리 프랑스에서도 일어나는 일이었다. 모두가 얘기하고 모두가 듣지 않는다. 말하는 가족들을 어색하게 쳐다만 보는 루이조차도 사실상 듣는 게 아니다. 자신이 준비한 말을 할 타이밍을 살피는 중이다. 이때 엄마가 루이와 부엌에 단둘이 있을 때 마주 보고 선언한다. 널 이해 못 해. 하지만 사랑해. 


*


환영하고 원망하며, 이해하지 못하지만 사랑한다. 이런 앞뒤 안 맞는 문장이 영화의 전체를 이룬다. 루이도 마찬가지다. 루이가 집을 떠난 이유를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설명해 주지는 않지만, 가족과 루이 사이에 좁혀지지 않는 거리감에서 짐작할 수 있다. 루이가 이해받지 못했음을. 또한 루이가 12년 만에 집에 온 이유를 눈치챈 건 유일하게 가족이 아닌 카트린(마리옹 꼬띠아르 분)이니, 가족들이 루이를 가까이에 두고도 얼마나 모르고 살았을지도 짐작된다. 그렇지만 루이는 결국 가족에게 돌아갔다. 이 또한 저런 앞뒤 안 맞는 문장 같은 상황 아닌가.


나와 엄마만 해도 그렇다. 엄마는 내가 왜 해산물을 먹지 못하는지, 왜 하루에 머리를 두 번 감는지, 왜 영화를 혼자라도 보러 가는지, 밥값에 버금가는 커피는 왜 사 마시는지, 카페에 가서는 뭘 하기에 한 시간씩 앉아있는지, 사람 많은 주말에 왜 나가서 노는지, 왜 택시를 타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나 또한 엄마를 이해하지 못한다. 마트나 가게에 가면 왜 투덜대면서 깎아 달라고 하는지, 핸드크림은 사달라고 해놓고 왜 바르지 않는지, 김장은 매번 다음 해엔 안 하겠다면서 왜 또 하는지. 정말이지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한다. 


만약 ‘이해할 수 없지만 사랑한다’는 게 이질적으로 다가온다면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아마 그 반대의 문장은 ‘널 다 이해해. 그래서 사랑해’ 정도가 될 텐데, 이 문장은 말은 되지만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다. ‘같기 때문에’ 사랑하거나 우리의 ‘같음’을 사랑한다는 것인데, 애초에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이며, 이유가 분명한 사랑이란 왠지 로맨틱하지 않다. 이해와 사랑은 어쩌면 되려 공존하지 않을 때 더 자연스러운 게 아닐까. 


결국 루이는 준비한 말을 하지 않고 떠나기로 한다. 12년 만에 온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잘 있다가 갑자기 가족들 듣기 좋은 말을 내뱉더니 이제 그만 가봐야 한다고 한다. 가족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아쉬움을 표한다. 앙투안은 여전히 화내고, 쉬잔은 울며, 엄마는 지긋이 머리를 맞대고 깊게 쳐다본다. 루이를 이해할 수 없지만 떠나는 루이를 가족들은 어쨌든 받아들인다. 


*


<단지 세상의 끝>은 자비에 돌란 감독이 자주 다루는 주제인 ‘가족’을 다룬 영화 중 하나이고, 그의 다른 영화보다 세간의 평이 좋지는 않은 영화다. 단조로운데 답답하면서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영화의 주제를 복기해 볼 필요가 있다. 가족. 가족이 딱 그렇지 않나. 


영화의 제목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싶다. 단지 세상의 끝. ‘세상의 끝’이라는 단어는 아득한 거리감을 연상시키며, 막바지, 막다른 길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 앞에 붙은 ‘단지’라는 단어는 뒤의 단어가 가진 무게를 가볍게 만들어준다. 왠지 거리가 멀 뿐이지 언제든 가도 될 것처럼 말이다. 결국 그 문장은 ‘멀어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곳’이라는 뜻처럼 다가온다. 멀어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곳. 그곳은 집이다. 루이는 그곳에 언제든지 돌아가도 된다. 그곳에 가면, 가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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