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구름이 몰려오고 거세디 거센 바람이 불어오더니,
유리창이 요란하게 소리를 내며 흔들거린다. 꽈지직.
창문이 깨지고 문짝이 뜯겼다. 나무가 우지직 부러지거나 뿌리째 뽑혔다. 차량이 뒤집히고 지붕이 날아가고 건물 외벽이 떨어졌다. 엄청난 물 폭탄이 쏟아지며 도로와 건물들이 순식간에 침수됐다. 무시무시한 태풍은 살벌한 바람과 비를 몰고 와 세상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다. 비는 피할 수 있어도 태풍은 피하기 어렵다.
태풍 '루사'를 기억하는가.
뜨거운 함성으로 대한민국이 들썩였던 2002년 바로 그 여름 끝자락. 전국이 초비상이었다. 괴물 같은 태풍 '루사'가 대한민국을 덮쳤기 때문이다.
태풍 '루사'는 2002년 8월 30일부터 9월 1일까지 우리나라를 할퀴고 갔다. 국가기록원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2002년도에는 남해상의 해수온도가 평년보다 높아 지속적으로 수증기가 유입되면서 태풍 '루사'가 우리나라에 접근하였다. 제주도 동해상을 거쳐 8월 31일, 18시경 전남 고흥군으로 상륙하였고, 9월 1일 15시경 동해 속초 지역을 지나가면서 열대성 저기압으로 약화되어 소멸되었다. 강릉지방의 경우 연평균강수량의 62%인 870.5mm가 하루 만에 내렸으며, 대형 태풍의 관통으로 역대 강우관측기록을 경신하는 국지성 집중폭우를 기록하였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는 마치 유령 도시를 방불케 한다.
누군가는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렸으며, 누군가는 일터가 파괴되었고, 누군가는 집이 사라졌다. 태풍 루사의 상처에서 많은 이들이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결코 남의 일이라고 할 수 없는 일이다.
SBS 프로그램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태풍 '매미'가 상륙했던 그날을 조명하며 방송에서 이렇게 말했다. 예측 불가능한 기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잠재적 재난생존자"라고.
태풍 '루사'는 막대한 재산과 인명 피해를 발생시켰다.
전국적인 피해 규모는 인명 피해 321명, 이재민 63,085명, 주택 침수 27,562 그리고 농경지 유실 17,749ha. 재산 피해가 총 5조 1,479억 원에 달한다.
특히 농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태풍 '루사'는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은 비를 뿌린 태풍으로 기억된다. 특히 많은 비가 내렸던 강릉 지역은 하천이 범람하고 도심의 저지대가 침수되었으며 피해가 다른 지역보다 극심했다. 30명이 급류에 휩쓸리거나 산사태로 목숨을 잃었고, 16명이 실종돼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는다.
바로 다음 해. 상처가 회복되기도 전에 또 한 번 거대한 태풍이 강타했다. 불과 1년 만에. 바람 강도가 역대 가장 강했던 태풍 '매미'가 찾아온 것이다. 초속 60m가 넘는 강풍의 괴력에 간판이 날아다니고, 나무가 뽑히고, 대형 선박이 밀려왔으며, 초대형 크레인이 넘어갔다.
게다가 어마어마한 해일까지 발생하며 더 큰 피해가 이어졌다.
자연의 광풍 앞에 우리는 무기력하게 쓰러져 갔다.
태풍 '루사'와 '매미'의 악몽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태풍이 온다는 소식에 신경이 곤두선다.
'루사'와 '매미' 같은 재난에 무기력하게 쓰러지는 일은 다시는 없어야 하지 않을까. 자연의 현상을 인간이 막을 수는 없겠지만. 신속하고 슬기롭게 대비한다면 피해 규모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태풍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지구 온난화와 관련이 있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전체적으로 바닷물이 뜨거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해수면 온도가 상승하면서 하층대기에 수증기가 증가하고 에너지가 늘어나면서 보다 강한 태풍이 만들어진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태풍이 만들어질지 모르고,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예상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태풍은 우리의 희망까지 휩쓸어 가진 못 했다. 우리는 태풍 '루사'와 '매미' 이후로 같은 피해가 반복되지 않도록 더 강력하게 대비를 해 왔고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영화 <데드라인>은 강력한 태풍 '힌남도'로 인해 재난을 겪게 된 포항제철소를 지켜낸 포스코 임직원들의 실제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늘 그렇듯이 재난 영화에서는 '지키려는' 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희생과 노력은 큰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이 영화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기적을 만들어낸 자들이 존재한다. 포항제철소의 심장인 '고로'가 멈출 위기에 처했고, 데드라인 이전에 고로를 되살리기 위한 시간은 불과 일주일이었다. 위기의 순간에서도 각자의 자리에서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해 가며 포항제철소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 자들이 있었다.
포항제철소에 잠입 취재를 나갔던 오윤화 PD는 그들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모두의 진심 어린 마음들이 절망의 뻘 속에서 건져 올린 작은 희망들을 불씨 삼아 고로는 그렇게 다시 타올랐다."
태풍은 또 올 것이다.
강한 폭우와 거센 바람을 동반해 사람과 동물을 위험에 빠트리고 거주지와 자연을 파괴할지도 모른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영화가 보여준 것처럼 인간의 의지와 연대의 힘을 잃지 말아야 한다. 국가기관의 대비 활동도 물론 필요하지만, 국민들의 적극적인 협조 또한 반드시 필요하다. 태풍이 자주 발생하는 여름과 가을에는 태풍 주의보나 태풍 경보에 특히 귀를 기울이고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노력이 모여 거대한 힘을 발휘해 과거와 같은 끔찍한 일들이 반복되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