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트로, 중남미 여행
사진 한 장을 보았다. 산 봉우리가 구름 위에 떠있는 듯한 모습이다. 사진 밑에는 마추픽추라고 쓰여있다. 정말 존재하는 곳일까? 네이버에 검색을 해보니 방금 본 사진과 같은 사진들이 무수히 뜬다.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구나! 마추픽추는 남아메리카 대륙의 도시 중 하나인 페루에 위치해있는 고대 잉카 문명의 유적지라고 한다. 새하얀 구름으로 둘러싸여 마치 하늘에 둥둥 떠있는 것 같은 모습이 너무나 신비로웠다. 내 인생에 처음으로 버킷리스트가 생긴 순간이었다.
2012년 스물셋이 되자마자 휴학을 했다. 대학생이라면 으레 거치는 필수 코스 같은 거였다고나 할까. 딱히 계획이 있진 않았는데 유럽여행을 할 거라는 친구의 말을 듣고 나도 유럽을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여행은 혼자 가게 되었다. 한 달이 넘는 여행인 데다 혼자 가는 첫 해외이기에 무섭기도 하고 걱정도 많이 되었다.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유랑' 카페에 들락날락했고 '여자 혼자 유럽여행'이라고 검색하면 나오는 글들을 탐독하기도 했다. 분명 글을 읽을 땐 뿜 뿜 솟아나던 용기가 혼자 생각에 잠길 땐 바람 빠지듯 푹 꺼지곤 했다. 그렇게 몇 달을 검색만 하며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독일 항공사 루프트한자에서 크레이지 얼리버드 이벤트를 했고 '직항 80만 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에 혹한 나는 곧바로 항공권을 구매해버렸다.
지지부진했던 나의 여행 계획은 항공권 구매 이후 구체성을 띄기 시작했다. 가고 싶은 나라를 정했고 나라 간 이동 수단과 머물 숙소를 예약했다. 나라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와 숙소를 찾아가는 법, 대중교통을 타는 법, 여행지에서 필요한 영어 표현 등 세세한 부분까지도 꼼꼼하게 준비했다. 처음엔 어떻게 여행 준비를 해야 하나 막막하기만 했는데 막상 비행기표를 구매하고 나니 모든 게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게 신기했다. 만반의 준비 끝에 유럽행 비행기에 올랐고 37일간 꿈같은 날들을 보냈다. 그 후 여행의 매력에 빠져 1년에 한 번씩 해외로 떠났다. 하지만 내 인생의 버킷리스트인 남미 여행은 '언젠간 가봐야지'라고 말만 하는 동경의 대상에만 머물렀다.
남미에 대한 열망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한 건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를 준비할 때였다. 캐나다에 가게 된다면 지리적으로 남미와 아주 가까워지기 때문에 분명 한국에서 출발할 때보다 이점이 더 많을 터였다. 항공권 비용도 아낄 수 있고 시차 적응을 할 필요도 없다. 무엇보다 더 이상 거리가 멀다는 핑계로 남미 여행을 미룰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누가 보면 남미 여행을 가기 싫은 것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건 정말 아니었다. 너무나 가고 싶지만 용기가 없어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며 가지 못했을 뿐.
운 좋게도 캐나다 워홀에 지원한 지 세 달만에 합격 레터를 받아 1년 동안 토론토에 살게 되었다. 일을 구하고 친구를 사귀며 새로운 문화를 경험하느라 남미 여행은 잠시 잊혔다. 그러다 한국에 돌아가기 3개월 전쯤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남미 여행 어떡하지. 치안 진짜 안 좋다던데. 혼자 갈 수 있을까. 그냥 캐나다랑 미국이나 여행하고 갈까...' 미지의 땅에 대한 두려움에 압도되어 또다시 쫄보가 돼버린 나였다. 그러다 언젠가 이런 다짐을 했던 기억이 났다. 뭔가를 하고 나서 ‘왜 했을까’하는 후회는 괜찮지만 뭔가를 하지 않아서 ‘그때 했어야 했는데’라는 후회는 하지 말자고.
인터넷으로 남미 여행 블로그를 찾아보고 도서관에 들러 여행 서적도 뒤적여봤다. 온통 영어로 되어 있는 여행 서적은 정보를 얻기는커녕 독해만 하다가 끝날 것 같아서 포기했다. 한국인 커뮤니티 사이트를 활용하여 남미 관련 카톡방에 들어도 가봤으나 그곳은 정보를 얻기보다는 동행을 구하는 곳 같았다. 나는 동행을 원하지 않았다. 혼자 가기는 두렵지만 그런 이유로 모르는 사람과 모든 일정을 같이 하고 싶지 않아 결국 카톡방을 나오고 말았다. 과연 나는 남미의 경이로운 풍경들 속에 서있을 수 있을까?
이제는 비장의 무기를 꺼내야 할 때다. 용기를 갖고 유럽 여행을 할 수 있게 도와주었던 것. 그건 바로 눈 딱 감고 항공권을 구매하는 것이다. 구매했다가 취소를 하면 그만인 거 아니냐고? 쓸데없이 돈을 소비하는 걸 싫어하는 내 성향 상 취소하면 드는 수수료 몇 천원도 아깝다. 그러니 일단 돈을 내면 무조건 가는 것이다. 단순하지만 이 방법은 (나에게만은) 꽤나 효과가 좋다. 인-아웃 도시와 여행기간을 정한 뒤 항공권을 검색했다.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항공권을 선택한 뒤 개인 정보와 결제 정보를 입력했다. 마지막으로 엔터를 침과 동시에 핸드폰에는 카드 승인 알림이 떴다. 남미 여행의 D-DAY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