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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씨 도 Oct 03. 2022

걸어서 공항 속으로

Everything happens for a reason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우수아이아. 그곳의 공항을 걸어서 갔다. 택시를 타기엔 돈이 조금 모자랐기 때문이다. 지도상 숙소에서 공항까지는 5.5km의 거리였다. 중간 지점까지만 걸어간 뒤 그곳에서 택시를 잡기로 하고 숙소를 나섰다. 



이동이 있는 날은 충분한 여유를 두고 나오기 때문에 서두를 필요가 없다. 천천히 주변의 풍경을 감상하며 가도 늦지 않을 터였다. 우수아이아는 크지 않은 작은 마을이었지만 살기엔 참 좋은 곳이다.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역으로 마을 뒤에는 설산이 앞에는 바다가 있다. 산과 바다를 보기 위해 차 타고 멀리 가지 않아도 되는 건 크나큰 행운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출발할 땐 콩알만 하던 공항이 이제는 눈에 띌 만큼 크게 보였다. 지도상 2km밖에 남지 않은 거리. 주변에 사람은 없고 뜨문뜨문 공항을 오가는 사람들을 태운 차들만 지나갈 뿐이었다. 빈 택시도 없고 비행기 이륙까지 시간도 충분하기에 그냥 마저 걸어가기로 했다. 차들이 지나갈 때마다 살짝 부끄럽기도 했지만 남들은 하지 않는 특이한 경험을 하고 있다는 이상한 뿌듯함이 들기도 했다.


우수아이아 photo by 제씨


곧 공항에 도착했다. 내가 탈 비행기는 우수아이아에서 출발하여 코르도바를 경유한 후 이과수로 간다. 나처럼 일정을 짠 한국인은 없는지 공항은 온통 서양사람뿐이었다. 비행기는 이륙 후 3시간 반 뒤에 코르도바 공항에 도착했다. 택시를 타지 않아 아낀 돈으로 샌드위치를 사 먹었다. 역시 걷는 건 경제적으로도 이득이다. 가볍게 허기를 달랜 뒤 이과수행 비행기 탑승 줄에 섰다. 그때였다.



"어? 혹시 아까 우수아이아 공항에 걸어온 사람 아니에요?"



뒤를 돌아봤다. 오 마이 갓. 한국인이다! 거기다 내가 우수아이아 공항에 걸어가는 걸 본 한국인이다. 뭔가 부끄럽기도 했지만 예상하지 않았던 장소에서 한국인을 만나는 건 늘 반갑다. 생각해보면 사람의 인연이란 건 참 신기하다. 만약 내가 공항에 걸어가지 않았더라면 그냥 지나쳐버릴 인연이 아니었을까? 그에 앞서 내가 택시를 탈 돈이 부족하지 않았거나 애초에 비행기를 다른 날짜에 예매했더라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우수아이아 공항 photo by 제씨



여행은 수많은 경우의 수로 묶인 우연의 집합이다. 우연의 요소가 여행을 더 신비롭게 만든다. 그렇게 생각하면 여행에서 만난 인연 하나하나 귀하지 않은 인연은 없다. 만남의 소중함을 알게 해주는 것. 소중함을 알기에 만남에 최선을 다하게 만드는 것. 나에게 있어 여행은 늘 그런 존재로 빛을 발한다.



이후의 얘기를 하자면, 이과수로 향하던 비행기는 폭풍으로 인해 착륙하지 못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회항했다. 우리는 하염없이 공항에서 기다리다 밤늦게나마 항공사에서 마련해준 호텔로 이동할 수 있었다. 혼자였다면 매우 당황하고 불안했을 테지만 그분이 있었기에 불안함을 덜어낼 수 있었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이분의 갑작스러운 일정 변경으로 호텔 1박을 양도받기도 했는데 평소 호스텔만 전전했던 나는 오랜만에 편안한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또한 그분이 침대 한편에 놓고 간 1달러는 에티오피아 공항에서 현지 돈이 없던 내게 물 한 병을 살 수 있게 해 주었다. 정말이지 여행은 예상하지 못한 일 투성이다. 근데 그게 내가 여행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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