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무원이 된 후 첫 해에는 무조건 이국적인 곳, 가보지 못한 곳, TV나 책에서만 보며 꼭 가고 싶다고 꿈꾸던 곳. 그런 환상 가득한 곳을 최우선으로 꼽았다. 낯선 도시에서 감탄사를 연달아 내뱉으며 구경을 하고, 시선이 닿는 모든 곳을 사진 찍으며 부푼 마음으로 여행을 하는 것, 그게 제일이었다. 대체로 유럽, 간간이 아프리카 휴양지 등이 그러했고 한국에서 가까운 아시아가 로스터에 나오면 솔직히 실망을 하곤 했다.
한국은 내가 지난 30여 년을 살아온 곳이니까, 아시아는 나중에도 충분히 갈 수 있으니까 등의 이유로 나는 더 멀리, 더 낯선 곳으로 가길 갈망했다.
그러나 한 달, 두 달 점점 시간이 흐르고 유럽과 아프리카를 연이어 다니다 보면 각각 다른 나라마저 거기서 거기 같고 좀 식상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렇게 간절했던 여행이라 하더라도 매일 반복되면 그것 또한 하나의 평범한 일상이 되어버린다. 게다가 누구보다 한국을 떠나 새로운 경험을 원했지만 태어나 자란 곳에 대한 그리움은 내가 인식하기도 전에 불쑥불쑥 찾아온다. 주변에 한국인 친구들이 많고 한국 식당이 도처에 있다고 해도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카타르이다. 그 말인 즉 해외 살이라는 건 언제나 마음 한 귀퉁이가 허전하고 늘 한국이 그립다. 그래서 멀고도 이색적인 타국으로 가득 차던 내 비딩 목록은 어느 순간 점점 인천과 동남아시아로 가득 찬다. (참고로 이웃 나라라는 중국과 일본은 여전히 가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인천이 늘 1 순위지만 인천을 못 간다면 차선책으로 한국인과 한국에게 우호적이고, 한국의 문화와 음식이 많이 퍼져있는 동남아시아, 그중에서도 마닐라를 선택한다.
마닐라에는 정말 여기가 한국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한국 음식들도 한국 제품들이 가득하다. 게다가 한국산 제품의 가격 또한 크게 차이 나지 않아 비싼 도하에 비하면 훨씬 가성비가 좋은 곳이다.
사실 어딜 가든 여전히 외국인이라는 신분은 변함이 없지만 무엇보다 필리핀 사람들은 한국인에게 호의적인 편이라 일단 마음이 편하다. 식당이나 그 외 공공장소에서 인종 차별 때문에 예민하게 신경이 날 설 필요도 없고, ‘혹시 내가 동양인 여자라서 저러나?’ 하고 두 번 세 번 생각하게 되는 일이 없다. 아무리 K-팝, K-영화가 전 세계를 휘몰아쳐도 여전히 유럽을 비롯한 대부분의 서구권 나라에서 동양인은 여전히 선 밖의 이방인이다. 내 성격 탓도 있겠지만 그래서인지 아무리 그림 같은 풍경과 문화유산에 눈이 즐거워도 마음은 온전히 편하지 않을 때가 많다.
거기에 나는 음식을 먹고 음미하는 데서 큰 즐거움을 얻기 때문에 식재료부터 완전히 다른 나라에서보다 한식 혹은 한식 비슷한 음식들이 많은 곳에 결국 마음이 더 가게 된다. 똑같은 한식당이더라도 한인이 많고, 식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는 동남아에서 먹는 한식과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 먹는 한식은 그 맛이 참 다르다.
그리하여 결국 세계를 돌고 돌아 마음이 향하는 곳은 언제나 ICN, 인천인데, 인천은 외국인 크루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도시라서 스케줄 받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그래서 ICN 아니라면 ICN의 사촌쯤으로 여겨지는 MNL, 필리핀 마닐라가 되겠다.
또한, 인천만큼이나 마닐라를 선호하는 두 번째 이유는 비행이 수월하다는 점이다. 도하에서 마닐라로 갈 때 비행시간은 대략 9시간, 마닐라에서 도하로 올 때는 대략 10시간가량인데 서비스가 메인 식사 서비스 1개, 서브 샌드위치 서비스 1개로 단 2개뿐이다. 그 보다 비행시간이 훨씬 짧은 유럽 비행에서도 똑같은 서비스를 하기 때문에 사실 왜 마닐라 비행에 서비스가 2개인지 의문이긴 하다. 승객 입장에서는 아쉬울 수 있지만 크루 입장에서는 10시간에 달하는 비행시간에 단 2개의 서비스라면 상당히 편한 비행이다. 거기에 승객들까지 굉장히 친절하고 매너도 좋은 데다 대체로 뭘 요구하질 않으시기 때문에 서비스를 하는 데에도 어려운 점이 없다.
유일한 단점은 비행시간이 너무 길어서 지루해서 죽을 거 같다는 것이다. 특히나 요즘은 코로나로 마닐라 공항 입국자 수를 제한하기 때문에 도하에서 마닐라로 갈 때는 승객이 20명도 채 되지 않는다. 보통 마닐라로 가는 비행기 기종의 최대 탑승 가능 인원 수가 388명이기 때문에 20명은 정말 텅텅 비어있는 수준이다. 보통 이 기종에 승객이 가득할 때 한 승무원이 담당하는 승객 수가 40~50명인 걸 감안하면 20명쯤은 나 혼자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러다 보니 각각의 승객에서 별 10개 수준의 서비스를 하거나 나무늘보처럼 아무리 느리게 서비스를 해도 1시간이면 서비스 하나를 끝내고도 남는다.
보통 서비스가 2 개면 이코노미 기준으로 이륙하고 바로 서비스 1개를 하고 착륙 전에 나머지 1개를 하게 된다. 그러면 중간에 서비스가 없는 7~8시간 동안은 고통받는 셈이다. 낮 비행이면 간간이 승객들이 콜벨을 눌러서 무언 가를 요청하기도 하지만 밤 비행이면 모두들 자느라 기내가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하다. 없는 일 마저 만들어가면서 일을 하고 10명이 넘는 크루들과 돌아가면서 수다들 떨어도 시간은 멈춘 듯이 더디게만 흐른다.
그때쯤이면 크루들끼리 항상 “과연 바쁜 게 나은 걸까, 지금처럼 조용한 게 나을까” 고민에 빠지곤 한다. 우리는 “그래도 조용한 게 좋지 미국 비행처럼 시도 때도 없이 요구사항 많아서 걸어서 미국 가는 것보다 낫다”라고 입 모아 말하면서도 마닐라 비행의 지루함을 토로한다.
그렇게 지겨움 속에서도 어찌 됐든 시간은 흐르고 마닐라 호텔에 도착하면 그때부턴 천국의 문이 열린다. 마닐라에는 아예 한국인들이 사용하는 배달 어플이 따로 존재하고 24시간 배달 가능한 업체도 많기 때문에 밤 11시에도 삼겹살을 시켜 먹을 수 있다. 카타르에서는 돼지고기를 먹을 수 없기 때문에 마닐라 랜딩 후 첫 끼는 당연히 삼겹살이다. 그리고 푹 자고 일어나면 두 번째 끼니로 돈가스와 이따가 비행기에서 먹을 김밥을 시킨다. 내가 좋아하던 한국 분식점의 경양식 돈가스 그 맛 그대로의 돈가스를 먹고 나면 나는 세상 행복하고 인자한 사람이 된다.
그 후 이번엔 장을 보기 위해 다시 어플을 켜서 한국산 제품을 장바구니에 가득 채운다. 라면도 종류 별로 담고, 종종 레이오버에서 먹을 컵밥과 햇반, 새해에 못 먹었던 떡 만둣국을 위한 재료들, 그리고 깻잎(외국에서 깻잎을 구하기란 너무 힘들다)! 그 외 심심한 입을 위해 한국산 과자들, 그 외 먹고 싶었던 야채 호빵 등을 주문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배달을 기다린다.
돈가스로 배부른 상태에서 기내에서 먹을 김밥을 챙기고 슈트케이스에 장 본 음식들을 테트리스처럼 채워나갈 때면 행복이 별건가 하는 철학적 의문에도 아주 쉽게 답을 내리게 된다. 가끔은 이런 1차원 적인 것에 너무 쉽게 행복을 느끼는 내가 조금은 부끄럽지만 어쩌겠는가, 식욕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고 한국 음식으로 그 욕구가 충족되어 기쁠 뿐인 것을.
비록 바라던 ICN은 실제로 가진 못했지만 MNL을 다녀오면 마치 한국을 슬쩍 맛보고 온 듯한 기분이 든다. 그렇게 한번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슬쩍 털고 나면 다시 힘차게 타국에서도 잘 살아갈 수 있을 듯한 기운이 생긴다. 빵빵해진 슈트케이스를 양손으로 영차영차 옮기면서 나는 오늘도 즐겁게 비행하자며 다짐한다.
아, 잊지 말고 다음 달에 마닐라 비딩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