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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타샤 Feb 12. 2023

군중 속의 향수(鄕愁)

늘 후텁지근한 여름일 것 같은 베트남에도 겨울을 지나는 이 계절에는 나름의 겨울이 온다. 해가 떠 있는 낮에는 여전히 태양의 열기에 숨이 막히지만  해가 느긋히 넘어갈 때면 선선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간질이고 시원하게 가벼워진 공기가 주변을 감싸며 어느새 설레는 여름밤이 된다.

그래서일까, 어둠이 내린 호찌민의 밤거리는 활기가 가득하다.

사방에서 몰려오는 오토바이 떼와 차와 사람들이 한데 뒤섞여 정신없는 소음을 자아내고 그 사이로 유유히 걸어가는 사람들의 움직임은 마치 서커스를 방불케 한다.

커다란 배낭을 멘 푸른 눈의 여행객들도 이곳의 더위에 지친 기색이 가득하면서도 동시에 이색적인 동남아시아의 풍경에 들떠서 시끌벅적하게 거리를 누빈다.

길거리 노점을 가득 채운 앉은뱅이 테이블과 의자에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시원한 사이공 맥주와 안주를 놓고 그간의 쌓인 회포를 풀어놓는다. 그 사이로 한껏 상기된 목소리와 기분 좋은 웃음이 메아리친다.


이런 여름밤,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오토바이는 참을 수 없는 유혹이다. 사실 베트남에 오면 꼭 오토바이 택시를 탄다. 복잡한 도로 위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것과 속도감이 주는 재미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리고 어렸을 적 엄마의 오토바이를 타던 추억 탓도 크다. 우리 엄마는 일 때문에 오토바이를 몰았는데 엄마가 퇴근길에 하교하는 나를 동네에서 만나면 앞 쪽에 앉을 수 있는 좁은 공간에 나를 앉히고 언덕 위에 있던 집으로 함께 올라가곤 했다. 우리 집은 버스정류장에서 1km 정도의 떨어진 데다 언덕 위에 있었다. 성인이 된 지금이야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어렸을 때는 그 시골길이 무척 길고 높아서 엄마의 오토바이는 내게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엄마와 함께 보내는 자투리 시간도 참 좋았다. 그래서 가끔은 집에 안 가고 동네 입구에서 엄마가 오는 쪽으로 고개를 빼고 언제 오나 일부러 기다리곤 했다. 그러다 멀리서 엄마의 오토바이가 보이면 그렇게 반갑고 신날 수가 없었다. 몸이 크고 제법 무거워진 후에는 그 앞자리에 앉을 수가 없어서 더 이상 오토바이를 탈 수가 없게 되었지만 지금까지도 내게 오토바이는 특별할 수밖에 없다. 자기 덩치 만한 책가방을 메고 하교하던 어린 딸과 오토바이를 타던 워킹맘 엄마의 소소하고 귀여운 추억이니까.

그래서인지 위험하다 싶다가도 베트남에만 오면 자꾸만 오토바이 택시를 예약하게 된다. 오토바이만 타면 너무 신나고 기분이 날아갈 듯 좋은데 선선해진 여름밤의 오토바이라니, 이걸 도대체 어떻게 참을 수 있단 말인가!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오토바이 택시로 호찌민 시내에 도착해서 마사지를 받은 뒤, 늘어진 몸으로 뜨근한 쌀국수에 숙주를 양껏 넣어 먹었더니 세상이 내 것 같은 만족감이 솟구쳤다. 피로도 풀었겠다, 배도 부르겠다 이제 목적지 없이 거리를 걸어 다니며 호찌민을 구경해 봤다. 간간이 보이는 한국 상점들이 반가워서 살 것도 없는데 괜히 기웃거려 보기도 하고 야외 테이블에서 저녁을 먹는 사람들의 음식을 슬쩍 훔쳐보기도 했다.


소란한 와중에 혼자 느릿하게 걷다 보니 어느 꽃집에 사람이 바글바글한 것이 눈에 띄었다. 호기심에 이끌려 나도 들어가 보았는데 사람들이 특별한 날이어서, 누군가에게 선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집에 꽂아둘 꽃다발을 사는 중이었다. 그들은 퇴근길에 꽃 가게에 들러 신문지로 대충 둘둘만 꽃다발을 사서 오토바이에 싣고 유유히 집으로 가고 있었다.

꽃을 사들고 집으로 가는 사람들, 야외 테이블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이공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 작은 오토바이에 옹기종기 함께 앉아서 어디론가 향하는 사람들… 저녁이 되어 각자의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일과를 마무리하는 광경 속에서 여행객이자, 타지에 사는 외국인인 나는 순식간에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낯선 도시에 와서 기분 좋게 여행을 하다가도 편안하고 정해진 일상을 살아가는 그곳의 사람들 속에서 혼자 다른 시간 개념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걸 느끼면 문득 외롭다는 생각이 스친다. 이상하게도 그런 기분이 들 때면 혼자 다니는 사람이 보이지 않고 가족들, 친구들, 연인과 함께인 사람밖에 보이지 않는다. 나는 마치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왁자지껄한 중에 나만 홀로 동떨어져 부유하는 듯하다.

그럼 어느 때보다도 더 강하게 내가 속해 있던 곳, 모두가 나를 알고 반기는 곳,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향수란 그렇게 소리 소문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다. 맛있는 음식, 값싼 물가와 다양한 즐길 거리, 호찌민만의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를 무척 좋아하는데도 나는 갑자기 여길 벗어나 집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에 휩싸여 외로워졌다.


퇴근길에 ‘뭐 해?’ 문자 하나로 갑자기 성사되던 친구들과의 급만남도, 각자의 도시에서 가장 오기 편한 강남역에서 맛집을 찾아 경쾌하게 함께 걷던 시간들도, 퇴근길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미주알고주알 수다 떨던 것도, 퇴근 후 호프집에서 치맥을 하며 회사와 상사를 신랄하게 욕하던 팀원들과 그 시간들도 그리웠다. 큰 의미 없이 사소하게 스쳤던 사람들과 추억들마저 모두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향수로 울렁거리는 이 마음이 며칠 뒤면 잠잠해질 거라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또 갑자기 어떤 순간에 나를 잠식시키듯 밀려왔다가 서서히 사라질 거라는 것도 알고 있다. 진짜로 돌아갈 때까지 마음 한 켠에 늘 이 그리움이 있을 거란 것도 알기에 ‘곧 괜찮아질 텐데 뭐!’ 하며 어깨를 들어 올리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다시 씩씩해진 발걸음으로 근처의 카페에 들어가 베트남 커피를 주문했다. 잎을 길게 늘어뜨린 식물을 천장에 메단 인테리어가 싱그러운 여름밤의 분위기를 한층 부각시키는 곳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단 베트남 커피를 한입 넘기고 밖을 바라보니 사람들이 하하호호 활기차게 거리를 채우고 있었다.


오늘따라 호찌민의 여름밤이 잔인할 정도로 유난히 낭만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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