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소영 Nov 22. 2022

번아웃

이렇게 내가 타인을 위해 살아본 적이 있었나.

이렇게 자아를 찾고 싶었던 적이 있었나.


자폐 아이를 키우면서 내 하루는 24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 써야 했다.

상윤이의 스케줄은 이동시간, 수업시간, 상담시간의 연속이다.

그중 제일 긴 시간은 이동시간이었다.


나는 상윤이와 두 살 더 어린 상우까지 키우고 있어

상윤이의 수업시간은 또 나의 이동시간이 되었다.

상윤이를 데려다주고, 수업에 넣어두고, 다시 상우를 데리러 가고 센터로 돌아와서 상담을 하거나,


더 정신없이 바쁜 날엔

상윤이를 수업에 넣어두고 상우를 데리러 가서 상우를 학원에 넣어두고 센터로 돌아와서 상담을 하고,

다시 상윤이를 다른 센터에 넣어두고 상우를 데리러 가고...

마치 단거리 택시운전사와 같은 하루를 보내야 했다.


나는 한 때 안전 주의자였지만,

 시간에 쫓겨 기다리고 있을 어린아이들을 생각하며 초조하게 운전하다 보니 운전습관 역시 조금씩 과격하게 길들여져 갔다.


하루하루 생각 없이 살다 보면 시간은 참 빨리 흐른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시간표대로 루틴대로 움직이면 하루는 바쁘지만 살만하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살아.'


그런데 문득 하루 중에 - 어딘가 처박아둔 채 잊어버렸던 - 내 자아가 떠올라 그를 찾기 시작할 때면

다잡았던 내 마음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내 삶 속에 나는 없는 걸까?'


이용 이용 사이렌이 울린다.

위험신호다.


한번 시작된 자아에 대한 생각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사는가?'로 연결이 되고


나란 사람의 존재 가치가 하찮게 느껴지는 그런 날,

그 마저도 내 역할을 제대로 해내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날,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막막한 기분이 드는 그런 날에,


반갑지 않은 손님,

번아웃이 찾아온다.


나는 아무것도 하기가 싫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고.


기운 차리자고 오히려 힘을 내보지만,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쏟아붓는 것처럼...

치워도 치워도 집은 치워지지 않고,

씻어도 씻어도 설거지는 쌓이는 것처럼...

버둥버둥거리면 거릴수록 나아지긴커녕

기운은 오히려 빠지기만 하더라.


상황은 더 이상 나아지지도 않지만

나빠지지도 않는 그냥 그 상태일 뿐인데

그저 나의 상태만 나빠질 뿐.


신체는 분명 땅 위에 있는데

나의 영혼은 중력이 끌어당기는 대로 지구의 맨틀과 외핵을 뚫고 내핵까지 파고 파고 들어가고...


'누가 내 말 좀 들어줘요.'

이야기할 기운도 의욕도 없을 뿐 아니라,


'어차피 이야기해봤자 바뀔 것도 하나 없는데...'

이야기해봤자 후련해지긴 커녕 답답함만 쌓이는 것 같은 기분에

나는 입을 다물고 고독을 택한다.


외롭지만

이 편이 차라리 낫다며...

혼자 견뎌보려 한다.


그렇게 남들 눈엔 아무 일도 없는 듯

평온하게 그렇게 매일 똑같이 잘 지내는 듯 보이지만

썩어서 곪아가는 마음은

하루하루 산다기보다는 버티다가 버티다가...


가까운 사람들의

아주 사소한 별거 아닌 말 한마디에 터져버리고 만다.

정말 생각 없이 의도 없이 내뱉은

그저 그런 시시한 말 한마디일 뿐인데...


실낱 같은 기대가 그래도 있었으니까.

적어도 당신은 이 상황을 조금이나마 이해해줄 거라는 기대.

가족이니깐, 같은 처지니깐, 장애에 대해 공부해 온 사람들이니깐...


관심.

나만큼은 아니라도

관심이 있을 줄 알았지.

우리는 관심이 있는 사람이 생기

뭘 좋아하고 관심 있어하는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떤 행동을 싫어하는지 궁금해하는 법이니깐,

적어도 나는 그들도 그럴 줄 알았지.


이 넓은 세상에

이 아이를 이해해줄 내 편이 적어도 몇 명은 있을 줄 알았지.


'이 사람은 정말 상윤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모르면 모르는 대로


'상윤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알은체 하면 또 그건 그것대로


나 또한 삐딱하게 바라보는 주제에

제대로 보지 않는다고 그들에게 서운해하고,

외롭다고...

내 편은 없다고...


펑!

눈물이 나고,

서럽고

서러워서 눈물이 나고,

외롭고

외로워서 눈물이 나고,

답답하고

답답해서 눈물이 나고,

멈추고 싶은데

멈춰지지가 않아 눈물이 나고,

이런 내 감정의 소용돌이가 무서워서

또 눈물이 나는 상황...


분명 그런 날이 있었다.

또 나는 그런 날을 보내고 있는 중일 테고

앞으로 그런 날을 살아갈 테지만...


그러니깐

지금은 그냥 일단 살아요.

하루만,

또 그렇게 하루만...

그냥 살아요.


뭐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 이 하루도,

대책 없이 흘러가는 이 하루도,

답답해서 미쳐버릴 것 같은 이 하루도,

슬픔에 젖어버려 다시 일어서지 못할 것 같은 이 하루도

좌절감에 끝이 보이지 않더라도

그냥 우리 오늘 하루를 살아내요.





이야기해봤자 의미 없는 그 얘기도

들려주시겠어요?

제가 잘 들어줄 수 있는데...

매거진의 이전글 109살까지 살고 싶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