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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영 Dec 13. 2022

제발 살려만 주세요.

2022년 12월 11일 일요일


도배한 지 한 달 만에 우리 집 벽지는 다 뜯겼다.

뜯기지 않은 벽지는 온통 낙서 투성이다.


산지 일 년도 안된 원목 테이블은 여기저기 홈이 파였다.

함께 산 의자는 낙서로 가득하고,

의자의 쿠션은 가위질을 해대서 여기저기 구멍이 난 채 숨이 죽었다.


새로 깐 장판에는 네임펜으로 낙서를 해놔서

지워도 다 지워지지 않은 흔적들이 가득하다.


장난감을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려

3개월에 한 번씩 변기 뜯는 비용이 고정적으로 들어가길래

아예 업소에서 쓰는 변기 석션기를 샀다.


비싼 에어워셔는 넘어뜨려 박살이 났고,

찢기고 뜯긴 침대커버가 몇 개인지 모른다.


요정도 되면 인내심 테스트다.

도 닦는 기분으로 살고 싶은데

그냥 하루하루가 강제 도 닦기다.


'나는 부처다.'

'나는 션이다.'

.

.

.

'너는 내 대신 장애인이 되었다.'라는 상상을 해보자.


'그래서 뭐! 아무리 그래도 이건 해도 해도 너무 하잖아!'

감정 통제가 되지 않는다.


이젠 최후의 수단이다.

이런 상상은 정말 하기 싫은데...

상윤이가 내 곁을 떠난다는 상상을 해보자.




나의 귀하고 고운 아들이 아프다.

의사 선생님은 더 이상은 가망이 없다며

나더러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한다.

이렇게 나는 너를 보낼 수 없는데 준비라니...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 그래.


아가...

내 아가야,

눈 좀 떠봐.

그 예쁜 눈 좀 떠서 엄마 한 번만 봐줘.

엄마한테 네 눈웃음 한 번만 보여줘. 응? 

너 나랑 눈 마주치면 눈웃음 짓곤 했잖아. 그 눈웃음 한 번만 보여주라.


아가 여기 엄마 볼 있어.

엄마 볼 좀 쿡 찔러봐.

엄마 볼 느낌이 말랑이 같다면서 쿡쿡 찌르곤 했었잖아.

이 검지로 말이야. 두 번째 손가락 좀 펴봐.

아니 다 펴지 말고 두 번째 손가락만 펴봐.

아니 왜 손에 힘을 못줘.

너무 세게 찌를까 봐 그래?

오늘은 세게 찔러도 짜증 안 낼게. 한번 찔러봐.


그래 아가야.

네가 좋아하는 옷 입었어.

너 이 옷 엄마 냄새난다고 좋아했잖아.

맨날 어디 벗어두면 홀랑 가져가선 킁킁 냄새 맡곤 했잖아.

네가 좋아하는 엄마 냄새라며.

엄마 냄새나는지 맡아봐. 일부러 엄마 냄새 더 배라고 안 갈아입었어.

냄새 나? 마음이 편안해지는 거야?


아가,

아가야... 내 아가야...

제발 엄마 혼자 두고 가지 마.

엄마 떠나지 마.

엄마는 너 없으면 살 수가 없어.


엄마는 너 없으면 숨을 쉴 수가 없어.

밥도 안 넘어가.

잠도 못 자.

나는 살 수가 없어. 

가지 마. 나만 두고 가지 마.


아니잖아.

장난치지 말고.

너 엄마 놀라게 하려고 장난치는 거잖아.

죽은 척하지 마. 다 알아.

이런 거 하나도 재미없으니깐 그만해.

어서 일어나서 집에 가자.


아가야 집에 가자. 

엄마랑 집에 가자.

집에 가면 네가 좋아하는 카레랑 된장찌개랑 돈가스랑 다해줄게.

이마트 가서 뽀로로 깍두기도 사 오자.


삐-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 같이 기계소리가 마치 이명처럼 들리고

내 시간은 멈춰있는데,

주변은 2배속으로 모두 분주하게 움직인다.


"안되는데... 안되는데...

나 아직 작별인사도 못했는데..."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중얼거리다

온몸이 힘이 풀리며 '어어어...' 하면서 툭.


꿈을 꿨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나 혼자.

"숨바꼭질인가? 너무 어두워서 찾을 수가 없어. 하나도 안 보여. 불 좀 켜봐."


어둠 속에서 너를 찾다가 찾다가 이내 네가 없음을 깨달았다.

울었다.

목놓아 울었다.

심장이 찢어질 것 같아서 가슴을 움켜쥐고 울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내 귀에 속삭였다.

"네 소원을 들어줄게."


누구냐고 묻고 따지고 할 생각도 들지 않는다.

"제 아들을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이요... 제발요..."

0.1초 만에 튀어나왔다.


"좋아. 네 아들의 목숨을 살려주도록 하지. 

그런데 이미 네 아들은 저승문을 통과해서 이승의 기억이 다 지워져 버렸어.

너에 대한 기억도, 말하는 법도 모든 걸 다 잊어버렸어.

목숨은 살릴 수 있지만 이승의 기억을 잃어버린 아이는 

아주 느리게 느리게 처음부터 배워나가야 할 거야.

하나하나 다 가르쳐야 되고, 

가르쳐도 금방 잊어버려서 가르치다 지칠 수도 있어.

네 아들은 예전의 네 아들이 아닐 거야.

그래도 괜찮겠어?"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으니 제발 살려만 주세요. 제발 제 아들을 돌려주세요"


"좋아. 후회는 없는 거다?

아! 그런데 말이야. 소원에는 대가가 있어."


"대가가 뭐죠? 제 목숨인가요? 얼마든지 내어드릴게요."


"아니 나는 너의 기억이면 돼. 지금까지 네가 아들과 행복했던 기억들 모두 가져가도록 하지."


그렇게 나는 눈을 떴다.

무서운 꿈이었다.

새벽 6시.

아침잠 많은 나인데 이 새벽에 눈이 떠졌다.

간밤에 김상윤이 이불이란 이불에 다 토를 해놔서,

얇은 이불 하나 덮고 잤더니 추웠는지 상윤이가 내 품에 딱 붙어서 자고 있다.

옆으로 옮기면 붙고, 옮기면 붙어서 침대 끝에 아슬아슬 떨어지지 않으려 하다 보니

불편하게 잠을 자서 온 삭신이 결린다.


상윤이를 가만히 쳐다본다.

긴 속눈썹에 뽀얀 피부가 내 아들이지만 잘생겼다.

'잠잘 때는 천사가 따로 없는데 말이지.

오늘은 소리치지 말자.'

다짐을 했다.


내 아이는 자폐스펙트럼 장애다.

나는 기억을 잃었다.

상윤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다시 내게 돌아온 순간까지의 기억 모두를...

이 아이를 살리기 위해 내 모든 걸 내어주겠다고 했던 그 기억조차 잃어버렸다.


나를 힘들게 하는 상윤이의 장애가 너무너무 미운가?

다시 상윤이를 바라보자.

그 아이의 장애는 내가 상윤이의 목숨과 맞바꾼 거잖아...




사실 이런 상상은 하기 시작하면

'상윤이가 아프다.'에서 눈물이 터져서 끝나버린다.


다시 선택의 순간으로 돌아간대도 

몇 번이든 항상 나는 똑같은 결정을 할 것이다.

너를 잃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네가 장애가 있는 건 매일 여전히 서글프다.


그래도 네가 건강해서 좋다.

내 곁에 항상 있어줘서 좋다.

너를 끌어안을 수 있어서 좋다.

너의 눈웃음을 볼 수 있어서 좋다.

내 볼에 손가락 꾹 하는 것도 좋고,

새벽녘 잠에서 깨 나를 찾아와 

내 품 안에 파묻혀 다시 잠이 드는 것도 좋다.


무엇보다 네가 내 아들이라서 좋다.





내일 눈이 팅팅 붓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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