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애쓰지 않는 삶

by 지니아

너무 애쓰고 있지 않나요? 가끔은 그냥 순리대로 흘러가게 놔두세요.


물먹은 솜마냥 온몸이 다 축 처지고 지친다. 과연 잘하고 있는 걸까..?

바쁜 현대인의 삶. 굳이 사회활동을 하지 않더라도 아이를 하루 종일 케어하며 종종거리는 전업주부들도 성실병에 걸려있는 이가 많다. 대표적인 예가 나다. 직장을 다닐 때에도 주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쉰 날에는 주말을 마무리하며 계획성 없이 하루를 보낸 것에 대한 죄책감이 들었다. 평일 내내 수고한 내게 주는 상이라며 말로는 나를 다독여도 막상 주말 또한 의미 있고 생산적인 일을 하지 못했음에 나를 다그쳤다. 전업주부로 전향을 하면서는 오히려 그러한 마음이 더하여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하루가 지나가야 그날 나의 삶이 의미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왜 그렇게 나를 다그쳤던 걸까? 그렇게 해야 나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라 여겼던 걸까? "얘야~좀 앉아라!" 어머님께서 늘 내게 하셨던 말이다. 나는 늘 집안에서도 서있는 편이었다. 아이와 함께 할 때를 빼놓고는 언제라도 어떠한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빠르게 반응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그것을 제대로 인지할 때는 아이와 함께 잠들 때였다. 저녁마다 살짝씩 부어있는 다리는 마시지를 하지 않으면 잠들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런 날은 그 부은 다리가 그날 내가 열심히 산 증거라고 생각하며 이상한 희열을 느끼기도 했다. 물론 그런 날들로 채워진 시간들이 쌓여 좋은 결과로 이어질 때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날에는 나의 자존감에 더 할 수 없을 만큼 생채기를 내었다. 나를 힐난하고 비판하였다.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가 어린 시절, 청소기를 통해 나오는 깨끗하지 못한 공기가 아이의 호흡기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를 접했다. 안 그래도 기어 다니는 아기가 집안의 모든 물건을 맛보기 시작하여 신경이 곤두서있을 때였다. 과감히 청소기를 포기하고 모든 집안을 손걸레로 훔치며 청소하기를 하루에도 여러 번. 장난감을 수시로 소독하고 볼 풀장의 수백 개의 공들을 하나하나 닦던(뽀로로 볼 풀장을 우리 집에 하사하신 친정엄마를 그렇게 원망해본 적이 없다.!), 이불빨래에도 앞으론 절대 햇빛이 없을 날이 계속될 것처럼 목숨을 걸었던 그야말로 '지랄 맞은' 삶을 살았다. 나는 그렇게 나의 유능함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힘겹게 육아와 살림을 전투적으로 치르고 나면 나의 세상 열심! 을 알 턱 없는 남편에게 온갖 짜증과 몰라줌에 대한 서운함이 폭발하곤 했다. 나중엔 주객이 전도되어 아이를 위한 청소에서, 조금만 어질러져도 화가 나는 청소를 위한 삶으로 바뀌고 있었다. 이러한 성향은 아이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우리의 기준에서 지저분한 흙바닥에는 아이가 전혀 발을 딛지 않았다. 그날로 나의 '청소를 위한 삶'은 끝이 났다. 집은 좀 지저분해도 모두가 편한 삶의 균형. 둘째는 덕분에 아주 자유로운(?) 환경에서 잘 자랐다. 지금 우리 집은 딱 안 죽을 만큼 깨끗하다.(미니멀라이프가 시급하다!)

아이들은 발달단계대로 성장한다. 아무리 아이가 잘 크기를 바란다지만 겨우 걸음마를 뗀 아이가 갑자기 달리며 공중그네를 넘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첫째도 둘째도 발달단계보다 덜하지도 더하지도 않는 딱 자기만의 속도로 자라주고 있다. 첫째 때의 일이다. 아이를 데리고 18개월쯤 문화센터에 갔더니 또래의 비슷한 개월 수 여자아이들은 조잘조잘 잘도 이야기했다. 원을 만들어 엄마와 아기가 함께 앉아 짝꿍이 되어 노래하고 서로 소통하며 선생님의 지시대로 활동을 이어나갔다. 다른 아이들은 엄마와 함께 단어를 내뱉으며 이야기도 하고 옆에 있는 아기들과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의사소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첫째는 입은 꾹 다물고 본인의 몸을 어디까지 쓸 수 있는지 늘 확인하고 싶어 하던 시기였다. 아기와 함께 하는 활동에 나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을 때도 있었고 첫째를 따라 이리저리 탐색을 하며 수업 시간을 다 보낼 때도 있었다. 첫째가 좀 더 문화센터의 프로그램에 적응했으면 하는 마음도, 예쁘게 앉아 단순 단어 이외에 문장을 연결하며 나에게 놀라움을 선사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으나 다른 이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싶었다. 도망가면 잡아오고 다른 이들의 집중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던, 그때 우리는 그야말로 '환장의 짝꿍'이었다. 나름 아이에게는 수다쟁이 엄마였는데, 책도 열심히 읽어 주고 규칙도 가르쳤는데 아이의 말문이 빨리 터지지 않아, 그리고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아 너무나도 애쓰던 시절, 비교는 내 아이와 나를 힘들게 한 감옥이었다. 적절하지 못한 비교는 비교를 하는 입장에서도, 당하는 입장에서도 폭력성을 지닌다. 지금 13살 아이는 달변가다. 논리로는 맞서기 힘들어 엄마의 권위로 상황을 무마하고 싶은 날이 면 난 가끔 난 그때 생각이 난다. 물론 그 문화센터 수업은 선생님의 제1수업, 그리고 우리 '환장의 짝꿍'만의 제2의 수업을 이어나가며 꾸준히도 다녔다.(그럴 거면 거기까지 가서 왜 수업을 들었는지 모르겠으나! 육아 동지를 만나고 싶었던 잠시 잠깐의 힐링을 위해서라고 해두자.) 밖에서의 활발한 활동 후 집에 돌아오면 신기하게도 책을 보며 자기만의 언어로 조잘거리게 된 건 비교의 감옥 이후 내 아이의 속도를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지 바로 얼마 후의 일이다.


관계를 맺으면서.

아이들이 친구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엄마들도 친구가 되는 경우가 있다. 반대로 엄마들이 가까워져 아이들에게 친구를 만들어 주는 경우도 많다. 둘 다 목적이 있는 만남이다. 그 사이에는 아이가 매개다. 육아 동지라는 공통점은 안타깝게도 같은 이유로 멀어지기도 한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엇갈려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끝이 나기도 하지만 문제는 아이다. 아이가 받는 상처는 생각보다 깊을 수도 있다. 서로 맞지 않지만 엄마들이 억지로 만들어 놓은 자연스럽지 못함에, 오늘 잠깐 다투었으나 내일 다시 잘 놀 수 있는 아이의 마음을 무시한, 어른들의 감정 다툼으로 전이된 선택권 없는 결정에, 아이들은 상처 받을 수 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이러한 문제들은 자연스럽게 정리되는 경우가 많다. 아이가 관계의 주인으로서 성장하여 선택권을 행사할 때 좋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도록 가끔씩 조언하는 것으로 부모의 역할은 다다. 부모가 애쓰는 시기는 딱 거기까지다. 이러한 문제없이 잘 지내는 관계도 무수히 많다. 그러나 그 안을 들여다보면 관계가 너무 무거워져 숨 쉴 틈 없어 탈이 나기 전에 적당한 거리를 둔다. 꼭 육아맘에게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라 생각한다. 너무나 가까워지고픈 사람을 만날 때에도 마찬가지다. 한쪽에서 만의 일방적 열심의 관계는 건강한 관계라 할 수 없다. 내가 다른 이에게 호의를 베풀어 행복했다면 딱 거기까지만 이어도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인정하자. 가끔은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경우도 있다. 난 그것을 딱 거기까지의 '시절 인연'이라 부른다. 인연의 끈이 아직 남아 이어져 있다면 나중 언젠가는 다시 만난다.

가끔은 그런 생각도 든다. 모든 일을 요 이 땅! 하고 시작하지 않아도, 그냥 흘러가는 대로 잠깐 몸을 내맡겨도 크게 무리는 없다. 그리고 그 안에서 다시 생을 살아낼 의지와 힘이 생긴다. 너무 애쓰지 않는 삶. 그냥 흘려보내도 괜찮은 삶. 과거의 끈을 놓지 못해 힘들거나, 아등바등하며 오늘 하루를 겨우 버티고 있다면 잠깐 흘러가도록 놔두어 보자. 가끔은 그런 삶을 살아도 좋다. 순리대로 흐르는 대로.


그 또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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