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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녀의 인생철학 Oct 06. 2021

열둘. 와 완전 소다 소, 한우.

두 번째 기적의 기록

고 3이 되었다.

자연스레 연극부 회장이 되었지만, 연극부의 활동은 수능을 핑계로 2학년 후배들에게 넘겨졌다. 방과 후, 수능에 관심 있는 친구들 몇 명이 교실에 모여 수능에 대비한 공부를 같이 했다. 실업계에서 수능 공부는 의미 없었지만, 고 3인 척은 했다. 뭔가 그래도 수능 공부를 하고 있다는 자체가 이제야 학생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좋았다.

2학기가 되면서, 진로를 결정해야 되는 시기가 왔다. 대학 진학반과 취업반으로 나눠지기 시작했다. 나는 진학반을 선택했다. 공부라고는 관심 없었던 내가 공부에 관심이 가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입학 때이다.


입학 전, 교내에 입학시험이 있었다. 그 시험이 왜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있었다. 그리고 입학을 했다. 나에게 장학금이 나온다고 한다. 그 입학시험에서 반 3등을 했다고 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중학교 때, 우연히 80점만 넘어가도 좋아서 날 뛰던 나였다. 늘 100점을 받다가 한 문제 틀려 97점 받았다며 폭풍 오열하는 친구를 참 이해 못했던 나이다. 그렇게 성적과는 담을 쌓고 살던 내가 3등에 장학금까지 받게 됐다고 한다. 이때부터이다. 돈이란 게 이런가 보다. 내 인생 첫 장학금을 받은 이후로 공부라는 것에 관심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실업계에서 공부에 관심이 가봤자이다. 나는 늘 연극부 활동과 친구들과 장난치고 놀기 바빴다. 그러나 나의 단기 기억력은 따라오기 힘들 정도로 뛰어났다. 시험기간만 되면 잠도 안 자고 달달 외웠다. 그렇게 한 과목당 나의 공부 시간은 하루, 이틀 정도면 충분했다. 그 단기 기억력 덕에 수시 점수는 기똥찼지만, 고등학교 때 무엇을 배웠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건 아이러니하다. 지금 초등학생이 문제를 들고 오면, 아마 하나도 모를 것이 분명하다. 어찌 됐든 그 기똥찬 단기 기억력 덕에 친구들 사이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로 각인이 되었다. 시험이 끝나면 시험 점수를 게시판에 공개했었다.

“이번엔 미니 꼭 이겨야지” 하던 친구가

“에이 또 졌다”하며 돌아가는 상황이 지속됐다. 이쯤이면, 건강복이 좀 안 따라줘도 나름 괜찮은 것 같다.




친척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인슐린 주사를 놓고 있는 나에게 사촌언니가 말했다.

“미니야, 니 주사 놓는 거 보이 간호사 하면 진짜 잘할 것 같다.”


성적이 안돼 실업계에 간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실업계 고등학교 3년은 어쩔 수 없었다지만, 대학교만큼은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싶었다. 첫 장학금 사태가 나에게 이런 마음을 안겨다 주었다. 그러나 고3이 된 현재에도 내가 무엇을 공부하고 싶은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모르고 있었다. 이런 나의 상황에 사촌언니가 물꼬를 틔워 주었다. 어디로 지원하고 싶냐는 선생님 질문에 “저 간호학과 지원할래요.”라고 말씀드렸다. “미니 니 성적으로는 간호학과 힘들다. 물리치료학과는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물리치료학과 지원하는 게 어떻겠노.”

어쩔 수 없이 지원서에 물리치료학과를 적었다. 수시 전형 원서를 받는 곳에 도착해서 원서 접수처 바로 앞에서 물리치료학과를 화이트로 지웠다. 지워진 그 자리에 간호학과를 써서 제출했다. 나는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하고야 마는 성질머리를 가졌다. 그렇게 담임쌤 몰래 간호학과를 지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면접을 보러 오라 했다. 면접을 보러 갔다. 왠지 모를 자신감이 있었다. 간호학과에서 보는 수시 점수가 말도 안 되는 점수인 줄 알면서도 이 자신감은 어디에서 온 건지 모르겠다. 다른 지원자와 면접실을 들어갔다. 먼저 옆에 앉아 있던 지원자의 면접이 진행됐다. 상당히 긴장이 된 듯했다. 내 차례가 되었다. 진짜 나는 운이 기가 막히게 좋다. 면접을 준비하면서 들어오기 바로 직전에 봤던 기사가 면접 질문으로 나왔다. 내가 봤던 기사를 작성했던 기자의 의견이 나의 생각인 듯 아주 유창하게 말솜씨를 뽐내고 나왔다. 아주 만족스러웠다. 결과가 나왔다. 후보 2위. 혹시나 입학을 취소하는 지원자가 있지 않을까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후보 1위도 되지 않았다. 그렇게 보기 좋게 떨어졌다. 물리치료학과를 지원했으면 거의 붙었을 텐데 아쉽다는 선생님 말에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했다는 사실에 나는 만족했다. 말도 안 되는 성적에 운 좋은 면접 실력으로 후보 2위가 됐었다는 사실도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보기 좋게 떨어지고는 어디로 진학해야 될지 막막했다. 교무실을 찾았다. 사회쌤이 계셨다. 사회쌤과 진학 상담을 진행했다. 그러나 속 시원하지 않았다. 나오는 길에 영어쌤이 보였다. 영어쌤께 진학 상담을 신청했다.

“쌤, 저 제대로 공부 좀 해보게 4년제 꼭 가고 싶은데, 어디로 가야 될지 모르겠어요.”

“음, 그럼 외국어대는 어떻노?”

“외대요?”

정말 상상도 못 했던 학교였다. 내가 외국어를 공부하게 되는 게 상상이 안 되었다.

“앞으로 베트남이 많이 뜰 거라는데, 베트남어과는 어떻겠니?”

“아 정말요? 베트남어과라?”

뭔지 모르게 너무나 끌렸다. 베트남어, 그렇게 다음 진로는 베트남어과로 진학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연극부 동기에게 베트남어과 지원하려고 한다고 이야기를 전했다. 알고 보니, 얼마 전 이 친구가 나에게 본인은 외대 베트남어과 지원할 거라고 이야기했었다고 했다. 그러나 외대에 전혀 관심 없었던 나는 듣고 그냥 흘러들었던 거였다. 외대 수시 점수 400점에 400점이었던 내가 베트남어과에 지원한다니

. “아 진짜? 베트남어과 지원한다고? 그럼 나는 태국어과 지원해야 되겠네.” 라며 친구는 자연스레 태국어과로 지원을 하게 되었다. 예상대로 합격이다. 합격의 통지를 받은 후, 수능에 참석했다. 다들 수시 합격했는데 수능은 왜 갔냐고 물었다. 나도 모르겠다. 왜 수능 치러 갔는지. 그냥 학생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고 싶었는지, 아니면 접수를 했으니 참석한 건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수능이 시작되었다. 오전 시간, 나름 컨디션이 좋았다. 좋은 컨디션만큼 시험도 그럭저럭 진행되었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같은 학교에 배정되었던 친구들과 모여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오후 시험시간이 되었다. 점심 먹고 식곤증 때문이었을까, 아님 점심으로 인한 고혈당 때문이었을까. 잠이 미친 듯이 쏟아졌다. 돌덩이가 올라간 눈을 힘내어 올리고 올리다,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대학 수시 합격도 됐는데 뭘.’ 그대로 책상에 엎어져 잤다. 코나 안 골았으면 다행이다.


내가 4년대에 진학한다는 소리가 외갓집에 전해졌다. 여자는 공부 안 해도 된다는 인지가 강하게 박혀있던 외삼촌이 나를 찾아오셨다.

“엄마 혼자 공부시킨다고 고생하는데, 그냥 2년제 졸업해가 엄마 도와서 동생 공부 돕는 게 어떻겠노”

“그런 소리 하지 마이소. 여자가 왜 공부 못하는데요? 나는 우리 시키들 하고 싶은 공부 다 시킬랍니더. 그런 소리 할 거면 그냥 가이소.”

엄마는 공부에 한이 많이 맺혀 있으셨다. 학창 시절 엄마는 시인이 되는 게 꿈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오빠들 공부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중퇴를 하시고 일찍이 사회생활 시작하신 것에 대한 원망이 있으셨다. 엄마는 그런 한을 여자인 나에게 넘기고 싶지 않아 하셨다. 그렇게 딸내미도 공부시킬 거다고 큰소리치시는 엄마가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 ‘빨리 졸업해서 엄마 도와 동생 공부 같이 시켜라.’는 말에는 동감을 하시는 눈치였다. 참 이놈의 눈치, 눈치가 없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말에 어느 정도 나도 공감이 가긴 했지만, 내 인생 처음으로 공부가 하고 싶어진 순간이었다. 누가 뭐래도 4년제는 꼭 나와야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 앞에 갔다.

“엄마, 입학금만 내도. 입학금만 내주면 학비랑 생활비는 내가 알아서 할게.” 그렇게 엄마와 약속을 하고는 곧바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엄마와 약속 후, 내가 4년제에 들어가게 된 것도, 졸업 후 성인이 된다는 것도 기뻤다. 아르바이트로 내가 원하는 돈을 마음껏 벌고 있다는 자체도 나에겐 기쁨이었다.




얼마나 기다렸나. 고대하고 고대하던 성인이 되었다.

고등학생이 된 후 엄마의 구속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미성년자로서의 자유와 성인으로서의 자유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온전한 자유를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성인이 되고, 대학생이 되었지만 나는 성인으로서의 온전한 자유를 느끼지 못했다. 빠른 생일. 1월생이었던 나는 대학생이 된 이후로도 완전한 성인은 아니었다. 이로 인해, 나는 항상 같은 과 동기의 주민번호를 빌려 외우고 다녔다.


“민증 검사 좀 할게요. 민증 보여주세요.”

“저 민증을 안 들고 왔어요. 적어드릴게요.”


다행히 나와 같이 외워온 민증 번호를 같이 적고 있는 동기가 든든했다. 고등학생 시절, 친구들과 사복을 갈아 입고 시장터 다락방에 드나들 때도 민증 검사는 없었다. 그때가 성인이었는지, 지금이 성인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당당히 술집 문턱을 드나들게 된 게 자유라고나 할까. 매번 진행되는 민증 검사에서 걸릴까 봐 가슴 조마조마하면서도 무사히 넘어갈 때마다 그 희열감이 좋았다. 그 누구도 나를 보며 술 먹지 말라는 사람이 없었다. 신분 검사만 빼고, 모든 게 나의 자유였다.


입학 전, 첫 오티가 있었다.

베트남어과 동기들과 선배들로 엄청난 큰 방이 가득 차 있었다. 차근차근 입학생들의 소개가 끝나고, 술판이 벌어졌다. 드라마에서 입학생들, 혹은 직장 신입생들에게 기합을 주며, 먹기 싫은 술을 억지로 먹게 하던 장면, 순간 그 장면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누구도 술을 강요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주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아무도 나에게 술을 강요한 사람이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순간 정신 차리니 누군가에게 업혀 이동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잠시 정신 차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눈을 떴다. 갈증이 엄청나게 났다. 그 엄청난 갈증과 동시에 쾌쾌 묵은 불쾌한 냄새도 올라왔다. 입고 있던 내 옷이 이상한 이물질로 가득 묻어 있었다. 이 날 이후, 여자인 내가 상처 받을까 봐 아무도 내색하지 않았다. 아주 아주 먼 훗날, 급하게 술을 마시고 급하게 취한 내가 모두가 있는 그 자리에서 토를 하고 뻗어 누웠단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 일로 놀렸어도 아무렇지 않았을 텐데, 나에 대해 몰랐던 베트남어과 사람들은 여자인 내가 상처 받을까 봐 이 일을 언급하는 걸 미안해했었나 보다. 이렇게 나의 공식적인 술자리는 시작되었다.




오티에서 댄스 동아리의 공연이 시작된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나는 댄스 동아리가 무척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중딩 첫 오디션의 주인공 박탈의 충격으로 고등학교도 연극부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연극부 활동을 하면서도 춤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지 않았다. 연극 공연 때 백댄서로 인기를 실감해서였을까. 춤에 대한 갈망은 더더욱 커져갔다. 대학교 입학과 동시에 나의 관심사는 대학 내 댄스 동아리였다. 꼭 들어가고 말겠다고 다짐하던 그 댄스동아리의 공연을 내 눈으로 보게 된 것이다. 너무 기대되었다. 보아의 ‘더블’이라는 곡이 흘러나왔고, 동아리 선배들이 무대에 올랐다. 집에서 영상을 보며 내가 땄던 댄스 동작과 맞춰보며 신이 나서 공연을 지켜봤다. 1절이 끝나고 2절이 되는 순간, 갑자기 음악이 뚝 끊겨버렸다. 그리고는 춤추던 선배들이 그 길로 무대 밑을 내려가 버렸다. 1곡을 온전히 보지는 못했지만, 나도 곧 저렇게 공연하게 될 걸 생각하니 흥분되었다.


입학 후, 많은 동아리들이 신입생을 모집하기 위해 길을 지나갈 때마다 홍보물을 나눠주었다. 다른 동아리는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디가 댄스동아리지?’ 내 눈은 온통 댄스 동아리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드디어 찾았다. 홍보물을 얼른 집어 들고 명부를 작성했다. 오디션을 준비 해오라 했다.

집에서 혼자 추던 춤이 많았다. 뭐를 출까? 아마 나와 나이가 비슷한 춤에 관심 많은 또래들은 다들 ‘제2의 보아’를 꿈꾼 적이 있을 것이다. 내가 출 수 있었던 보아의 춤 중에 ‘아틀란티스 소녀’를 선택했다. 오디션? 별로 걱정되지 않았다. 점수와 상관없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고 2 때, 노래를 기똥차게 잘하던 친구와 SM 공식 오디션 행사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이런 대형 기획사의 오디션에 처음 참석한 거라 잘 몰랐던 나는 그냥 가서 춤만 추고 오면 되는 줄 알았다. 친구와 오디션 장소에 도착했다. 엄청 이쁘고 화려하게 생긴 아이들이 아주 화려한 의상에 풀 메이크업까지 하고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내 모습을 내려다봤다. 엄청 뚱뚱해 보이는 니트에 펑퍼짐한 청바지, 시장터에서 산 운동화, 촌티 팍팍 나는 시뻘건 맨얼굴까지. 창피함과 동시에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아, 합격하긴 글렀구나…’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순 없었다. 나눠주는 큰 번호 스티커를 뚱뚱해 보이는 니트에 붙이고 관객석에 앉아 내 번호가 되기를 기다렸다. 댄스 장르를 선택한 아이들은 다 ‘제2의 보아’를 꿈꿨나 보다. 죄다 보아 춤을 췄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보아의 춤을 신청했는가. 같은 곡을 선택한 아이들이 조를 편성하고 뭉뜽거려 오디션을 봤다. 내가 신청한 보아의 ‘No.1’ 차례가 되었다. 무대에 올라가기 위해 대기실로 갔다. 풀메이크업에, 공연에 알맞은 의상에, 이쁘장한 얼굴들까지. 뭔가 초라했지만 춤에는 자신 있었다. 그렇게 단체로 무대에 올랐다. 나는 기죽지 않았다. 아주 최선을 다해 췄다. 결과는 보기 좋게 떨어졌다. 그러나 같이 참석했던 친구 말이, 친구가 앉아있던 주변에서 내가 제일 잘 춘다고 했다고 한다. 그거면 충분하다. 오디션에서 떨어질 것은, 오디션장에 도착한 순간 예측했기 때문이다.


자신 있게 댄스동아리 오디션을 향해 갔다. 연습실로 오라 한다.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다들 나의 춤을 보기 위해 구석에 모여 앉았다. 그 모여 앉은 인원 중에 신입생들이 많이 있었다. 알고 보니, 내가 신청을 늦게 한 터였다. 다들 이미 오디션을 다 보고, 댄스 연습을 진행하고 있는 터였다. 노래가 시작됐다. 집에서만 추다 이렇게 또 공식적으로 춤을 추고 있는 자체가 너무 좋았다. 곡이 진행될수록 선배들이 하나둘씩 연습실로 들어오며, 나의 춤을 보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1절이 끝났다. “우와~” 다들 잘 춘다며 손뼉을 쳐줬다. 됐다. 이 정도면 만족이다. 어디 두바이 귀족처럼 생긴 시커먼 선배가 동방(동아리방)으로 가자고 한다. 혹시 춤을 어디서 배웠냐고 물었다. 실제 댄스와 똑같이 춰서 놀랬다고 한다. 그렇게 그토록 원하던 댄스동아리의 인원이 되었다.





댄스동아리 연습은 하교 후 7시부터 9시까지 매일 있었다.

매일 2시간씩 춤 연습이 쉬운 운동은 아니었으나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매일 진행되는 춤 연습이면, 체력도 좋아지고, 다이어트도 절로 돼야 정상일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똥배가 나오기 시작했다. 매일 2시간씩 연습을 끝내고 나면 다들 체력이 떨어지곤 했다. 동아리 사람들은 춤만큼 술도 참 좋아했다. 그렇게 멋 들어지게 운동하고는 떨어진 체력을 늘 술판으로 채웠다. 매일 춤 연습과 더불어 1+1으로 딸려온 술판에 똥배가 안 나오면 이상한 노릇이었다. 나는 술만큼이나 좋아했던 게 안주거리였다. 늘 먹는 걸 눈치 보며 지내다가 엄마 따라 결혼식 뷔페를 가면 ‘이때다’ 싶어 목 구녕에 차 오르도록 먹던 나였다. 그런 뷔페와 같은 상황이 동아리 연습이 끝나면 매일 눈앞에 펼쳐졌으니, 이런 술자리가 안 좋으래야 안 좋을 수 없었다. 학생 신분이라 넉넉한 돈이 없었던 대학생들이라, 연습 후 술판은 동방에서 많이 펼쳐졌다. 그 자리에 늘 빠지지 않고 있었던 치킨. 뼛속까지 자리 잡고 있던 식욕이 마주 샘솟았다. 다 같이 자리잡기도 전에 한 손엔 양념치킨, 다른 한 손엔 후라이드 치킨을 들고 번갈아 맛보며 먹었다. 아직 동아리 선배들과 친분을 쌓기 전이라 동기들은 집에 가야 한다며 자주 술자리를 피했지만, 난 늘 그 자리에 함께 했다. 이런 행복한 순간에 내가 빠지면 안 되는 일이다. 그렇게 나는 신입생 중에 동아리 술자리를 절대 빼지 않는 신입생이 되었다. 나의 변함없는 식탐을 지켜보던 예비역 선배가 말했다.


“우리 1학년 때 한참 돈 없어서, 몇 백 원씩 모아 가 깡소주 한 병 마시고, 우리 집에 가서 술 퍼먹고 있었는데, 엄마가 들어오셔서 우리 먹는 거 보고는

“와, 소는 키아도 얘네는 못 키우겠다” 그러셨거든. 와 미니 먹는 거 봐라. 소다 완전 소. 진짜 먹는 거에 비해서 살 안 찌네.” 늘 변함없이 기겁하듯 먹는 나를 보며 놀라면서 말했다. 그 자리에 다 떠난 동기들을 뒤로하고 3명의 신입생이 있었다.

“누가 소띠 아니랄까 봐. 너네 진짜 잘 먹네. 너네 앞으로 소해라. 미니는 머리 까마니깐 한우, 지혜는 머리 노라니까 LA소, 민주는 키 크니깐 어미소 하면 되긋네.”


그렇게 나는 한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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