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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녀의 인생철학 Oct 29. 2021

열다섯. 젊음이 좋다한들, 술이 좋다한들

두 번째 기적의 기록


대학생이 된 나는 뭔가 모를 자유와 동시에 시간에 참 얽매이며 산 것 같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요리 솜씨가 좋으셨던 엄마는 횟집의 메인 요리사로 아주 오랫동안 근무를 하셨다. 그 덕에 나의 밤 시간은 자유 그 자체였다. 매일 진행되었던 댄스동아리 연습이 끝나고 또한 매일 있었던 술자리에 맛난 안주를 배에 잡아넣기 위해 한 번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아직 선배들과 친해지지 못해 어색했는지, 연습이 끝나면 다 가버린 동기가 없는 회식자리에 어김없이 나는 있었다. 그뿐이랴. 동기와 선배들과 급속도로 친해진 과 동기들은 내가 동아리 연습이 끝나기를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미니야, 언제 끝나노? 우리 학교 앞에 막걸릿집에 있다. 빨리 온나.”


연습이 끝나면 거의 밤 9시,

이 늦은 시간까지 나를 위해 기다린 친구들 그냥 저버리고 가는 건 의리가 아니다. 베트남어과 회식 자리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이토록 먹고 싶고 참석해야 할 술자리가 많아지니 알바도 끊임없이 해야만 했다. 방학 동안 했던 과자공장 알바로는 이 모든 행사에 참석하기에는 빠듯했다. 주로 식당과 뷔페 등을 오가며, 알바며, 동아리 연습이며, 회식자리며 할 것 없이 참 바지런을 떨며 부지런히도 살았다.


나는 술을 좋아한 건 아니다. 그런… 것 같다.

술이 센 편도 아니었다. 소주 1병이면 알딸딸해지기 시작하고, 1병 반을 먹으면 정신이 오락가락하기 시작했다. 이건 술이 센 게 아닌 거다. 솔직히 술? 도무지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모르겠다. 맥주 광고를 보면,  음료수 마시듯이 아주 시원하게 벌컥벌컥. 나는 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음료수와 맛이 비슷할 줄 알았다. 어쩜 그렇게 맛있게도 마시던지. 고등학생 때 으른들 몰래 친구들과 마셨던 맥주는 진짜 더럽게도 맛이 없었다. 내가 생각했던 달짝지근한 맛이 정말 ‘1’도 없었다. 그 맛없는 술자리에 늘 빠지지 않고 참석한 수많은 음식들, 그 음식들이 나를 술에 빠지게 해 주었다.


참 이 중독이란 이런 건가 보다.

아주 맛났던 안주만큼이나 알딸딸하게 만들던 마약 같은 중독.

평소에 늘 착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남들 앞에서 늘 착한 척만 했어야 했던 나를 완전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던 이 마약 같은 넘. 참 매력적이었다. 첫 번째 뇌전증의 기적 이후, 상당히 긍정적으로 바뀌긴 했지만, 술에 취한 나는 아니었나 보다. 내 인생에 무엇이 그렇게도 서러웠는가. 술만 취하면 그렇게 울어댔다. 늘 친구들에게 “착하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지냈지만, 나는 그게 믿기지 않았나 보다.


그래서 였는지, 고등학생 때 술만 취하면 친구들에게 진실 게임하자고 그렇게 졸라댔다. 서로에게 섭섭한 건 없었는지.

진실 게임하자 제안하면서 분명 나에게도 섭섭한 게 없을 수 없다는 느낌을 끊임없이 받았던 것 같다.

나는 알고 있었을 터. 내가 결코 착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그렇게 술에 취한 나는 평소의 착한 척, 긍정적인 척하던 나를 맘 놓고 내려놨다.

무엇이 그리 서러웠는지,

그래.

이렇게 아픈 몸으로 살아낸 인생이라면 이렇게 울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렇게 나는 마음 놓고 대성통곡을 했다. 술만 취하면.




술맛은 진짜 더럽게도 맛이 없었다. 소주?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쓴 맛을 어찌 맛있게 먹을 수 있겠는가.

소주를 드시는 으른들은 소주를 마시며 인생의 쓴 맛을 같이 삼킨다고 하던가.

그래도 맛이 없어도 느므 드릅게 맛없다. 이 쓴 맛은 아직 인생을 덜 산 내가 맛 볼 맛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첫 술은 어른에게 배워야 한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술버릇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을 보면 말이다.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베트남어과 단체 회식이 있었다.

동기뿐만 아니라, 전 학년의 선배들이 다 같이 모인 자리였으니, 얼마나 활기차고 좋았겠는가.

안 그래도 좋아하는 술자리,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무진장 좋아하는 나. 그렇게 그 회식이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앞에 술잔을 채웠다. 나는 꺾어 마신 적이 없었다. 건배를 하면 무조건 한방에 입 속으로 털어 넣었다.

그렇게 1병을 마셨을까. 취기가 슬슬 올라오며 목소리가 UP이 되기 시작했다. 조금 더 지나니 눈도 어질어질, 정신도 알딸딸해지기 시작했다. 나의 바로 맞은편에 앉아있던 2학년 여자 선배가 건배만 하고 술잔을 내려놓는 게 보였다.


“언니! 안 마시고 뭐해요. 같이 마셔요. 짜~~~ 안.”


보통 신입들이 술 안 마시고 빼면 선배들이 마셔라고 권유하는 게 드라마나 TV에서 많이 봤던 장면이 아닌가. 역시 나는 평범하지 않다. 술 안 마시고 빼는 선배가 있으면 그렇게 마셔라고 들이댔다. 본인도 제정신이 아니면서 말이다. 술에 너무 많이 취해버렸다. 1차 술자리 가게에서 나온 후, 정신이 오락가락하며 몸도 잘 가누지 못하는 나를 동기 친구들이 양 옆에서 나를 부축하며 자리를 옮기는 게 느껴졌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술맛은 없어도 이 기분은 묘하게 좋았다. 이 기분 이대로 세상의 모든 풍파와 걱정을 내려놓은 채, 잠시 술기운에 힘입어 착함 콤플렉스를 내려놓고 철없이 행동해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는 이 상황이 아마 그렇게 편했을지도 모르겠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 축제가 있었고, 나의 공연도 끝이 났다.

생전 먹을 것 앞에서 참아본 적이 없었던 내가 이 공연이 무엇이라고, 내가 먹을 것 앞에서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래도 다행히 고통은 잠시였다. 공연이 마무리되고 바짝 조여놨던 나사를 풀 타이밍이 왔다.

과 동기 친구들과 해가 미처 저물지도 않은 밝은 날에 운동장에 줄줄이 세워져 있던 주막들을 둘러봤다. 제 각기 과마다 특색을 살린 주막 명칭과 안주들로 우리를 신나게 유혹했다. 그래도 첫 발걸음은 우리 과여야 되지 않겠는가. 동기들과 우르르 베트남어과 주막으로 들어가 자리 잡고 앉았다. 주막의 요리를 담당하던 과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학교 축제는 고등학교 축제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 술이란 게 신기할 따름이다. 그렇게 어두워지지도 않은 밝음 밑에서 우리의 정신은 술에 뺏기고 있었다.


그 술자리는 해가 저물고 날이 넘어갈 때까지 이어졌다. 곧이어 연예인들이 공연을 한다고 한다. 이미 명당은 교내 학생들이 다 자리 잡고 있었다. 연예인의 공연을 무척이나 보고 싶어 먼 곳까지 가고 싶지 않았다. 자연히 무대 뒤편으로 갔다. 당시 ‘유니’라는 가수로 활동했었던 (故) 허윤 가수의 무대가 있었다. 무대 뒤편에서 유심히 살펴봤다. 분명 우리가 공연했던 무대의 바닥, 빨간 레드카펫이 깔려 미끄러지지도 않는 그 무대 위에 하얀색 20cm 정도의 하이힐을 신은 채 아주 현란하게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 신기할 따름이다. 조금만 높은 신발을 신고 춰도 발에 집중한다고 춤에 신경이 안 쓰일 법도 한데, 전문가는 전문가인가 보다. 계단 하나를 올라탄 채 너무나도 여유롭게 무대를 즐기는 모습이 너무 신기했다.


연예인의 공연도 친구들과의 술자리의 재미를 대신할 수 없었다. 연예인 공연 하나 봤으니 이미 다 본 것이나 다름없었다. 친구들과 술에 취하느라 다른 가수의 공연을 보지 못했다. 가수의 공연만큼이나 과 친구들과의 술자리가 너무나도 재미있었다. 시간은 10시를 넘어 11시를 향하고 있었다. 슬슬 집에 가야 된다는 압박감이 왔다. 친구들이 더 놀다 가자며 나를 꼬셨다. 그 유혹이 그렇게 달콤할 수 없었다. 엄마는 어찌 아셨는지 귀신 같이 알아맞히시고 전화를 하셨다. 당연히 전화를 받으면 안 온다며 야단치실 게 뻔했다. 엄마의 번호가 뜬 핸드폰을 뒤집어 놓았다. 양심이 조금 찔리긴 했지만, 그래도 친구들과 있는 이 기분을 잔소리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엄마의 전화는 끊이질 않았다. 쉬지 않고 뜨는 엄마의 번호를 보며 양심의 가책보다 짜증의 마음이 불쑥 튀어 올랐다. 성인이 되면 내 마음대로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좋았다. 그러나 중, 고등학생 동아리 활동을 할 때만 해도 없었던 엄마의 간섭이 성인이 되고 난 후 더 심해져 가는 느낌이었다. 이제 좀 자유를 느끼나 했더니 없던 간섭이 생긴 게 너무나도 못마땅했다. 그렇게 엄마의 전화를 씹는 경우가 잦아지던 터였다.


전화를 받지 않으니 전화를 중단할 생각이 없다는 듯 엄마의 전화벨이 계속 울렸다. 어쩔 수 없이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아 왜, 왜 자꾸 전화하는데”

“니 지금 뭐하는 짓이고! 왜 전화 안받노!”

“친구들이랑 있어서 그랬다.”

“언제오노. 이 늦은 시간까지 안 오고 뭐하노”


순간 친구가 더 놀다 자기 자취집에서 자고 가라는 이야기를 전했다.


“엄마.. 내 친구 집에서 자고 가면 안되나?”

“무슨 소리하노.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와.”

하며 전화를 끊어 버리셨다.


엄마의 단호함은 두 번 다시 부탁해도 절대 허락이란 없다는 뜻이었다. 친구들과의 자리가 너무나도 재미있었지만, 엄마의 단호함을 뿌리칠 수 없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집으로 향했다. 재미있던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나왔다는 아쉬움과 집에 들어갔을 때 엄마의 잔소리를 들으며 싸워야 되는 짜증이 같이 몰려왔다. 기분 좋게 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 아주 퉁명한 표정으로, 술에 취했다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정신을 똑띠 차리고 집으로 들어갔다. 엄마가 몸져누워계셨다. 누워있던 엄마에게서 이유 없는 트림 현상이 줄 곧 이어지고 있었다. 그 덕에 엄마의 잔소리를 들으며 싸울 일은 없어졌다. 그렇게 씻고 자리에 누웠다.




철이 없었던 그때에는 몰랐다.

미성년자일 때에도 없었던 엄마의 간섭이 그저 싫을 뿐이었다. 그러나 내가 밤늦도록 들어오지 않고 연락도 되지 않으면,

혹시나 또 간질 증세로 발작은 일어나지 않았는지,

저혈당 쇼크로 쓰러지지 않았는지

엄마가 걱정하고 계셨다는 것을 아주아주 먼 30대가 되어 결혼한 친구들이 자식을 낳으며 아픈 자식들 걱정하는 모습을 본 이후에야 알게 되었다.

당시 이유 없는 트림 현상도 나로 인해 극도의 걱정과 스트레스로 신경을 바짝 쓰셨다가 나와 통화가 된 이후 순간 마음을 놓으며 신경성으로 나타나는 증상인 것도 30대가 되어서야 알 게 되었다.


나이가 드는 것이 싫은가?

노화가 오는 것이 싫은가?

젊음이 아무리 좋다 해도,

두 번 다시 철 없이 엄마 고생시켰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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