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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녀의 인생철학 Nov 24. 2021

열일곱. 짝사랑 말고 첫.

두 번째 기적의 기록


대학 입학 후, 첫 방학이 시작되었다.

댄스 동아리의 두바이 회장 선배가 미션을 하나 전해주었다.

방학 동안 가요댄스 안무를 따온(완성해온) 사람에게 메인의 자리를 내어 주겠다는 미션이었다. 보통 메인 댄서의 자리는 안무를 따와 가르쳐준 사람이 메인을 맡아서 했다. 당연히 그 자리는 신입생이 아닌 선배들의 자리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 미션은 신입생도 메인 자리를 내어주겠다는 선배의 배려가 담긴 미션이었다. 마음속 욕심이 슬금슬금 올라왔다. 나에게도 기회가 왔다.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가슴 설레는 가수가 아주 멋진 퍼포먼스를 가지고 컴백을 했다.

보아의 ‘My name’.

방학 동안 보아의 춤을 마스터하고 집 거울이나 어두워진 창문을 거울삼아 보면서 연습을 해 나갔다. 그리고 각기 준비한 춤과 함께 동아리 연습실에 모였다. 동기들 중에 춤을 따온 멤버가 한 명도 없었다. 유일하게 신입생 중에 춤을 따온 멤버가 되었다. 나와 같은 보아의 ‘My name’을 준비한 사람은 3학년 선배인 인이 언니, 2학년 선배인 형주 언니, 그리고 나. 이렇게 3명이 보아의 춤을 준비했다. 아, 선배들과의 경쟁이라… 속으로 ‘메인 자리를 차지하긴 어렵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가요 댄스를 따 매일 집에서만 추던 내가, 따온 춤을 남들 앞에서 추게 된 게 그저 기분이 좋았다. ‘메인 자리는 물 건너갔고, 다들 보는 앞에서 열심히만 추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선배의 안무가 끝나고 내 차례가 돌아왔다. 선배들과 동기들이 보는 앞에서 정말 열심히 췄다. 두바이 선배의 결정이 났다. 결국 예상대로 3학년 선배였던 인이 언니가 메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보아의 이번 춤이 너무 내 스타일이라 조금 아까운 생각이 들었지만,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터였다. 메인 오디션과 발표가 끝나고 동방(동아리방)으로 향하는데, 오디션을 보지 않았던 2학년 여자 선배가 조용히 나에게 왔다.

“난 니가 될 줄 알았다. 니가 제일 잘 추던데.”

아무래도 이 선배는 나를 아주 좋게 보고 있는 게 분명하다. 축제 공연, 디바의 메인 자리도 내가 될 줄 알았다며 이야기했던 그 선배이다.

이유야 어찌 됐던 선배 언니의 그 말에 기분이 어찌나 째지던지.

이거면 됐다. 이 언니의 말 한마디에 내가 메인이 되지 않아도 된 것마냥 기분이 좋았다.




2학기가 시작되고, 학교 수업이 끝난 후 동아리 댄스 연습도 지속됐고, 2시간 열심히 춤을 추며 뺀 열량을 채워줄 술자리도 꾸준히 지속이 되었다. 1학기에는 신입생과의 어색함으로 아주 과묵했던 두바이 선배의 동기 남자 선배(축제 코요테의 ‘디스코 왕’ 안무 때, 나의 메인 타임에서 과묵했던 오른쪽 댄서 선배, <열셋. 미니의 오징어 게임 참고>)도 술자리를 빠짐없이 참석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선배의 집이 우리 집과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아파트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술을 아주아주 좋아했던 이 선배와 술자리의 안주 먹거리를 아주아주 좋아했던 나는 동아리 회식자리에서 중간에 끊고 집에 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항상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채웠고, 집이 가까우니 귀가도 늘 같이했다. 두바이 선배는 술자리는 늘 함께 했으나 운전을 해야 되는 탓에 술을 마시지 않았다. 과묵한 선배와 나는 택시비를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 술자리가 끝나면 두바이 선배의 차를 얻어 타고 망미동까지 갔다. 망미동에서 우리 동네까지면 택시비를 절반이나 아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아리 회식 자리에서 늘 술을 마시지 못했던 두바이 선배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망미동까지 차를 얻어 타고, 차를 얻어 탄 멤버들과 두바이 선배의 아쉬움을 달래주기 위한 술자리 2차를 망미동에서 진행했다. 그렇게 동기들 없이 선배들과 또 다른 술자리엔 늘 내가 있었다. 그렇게 술자리와 귀가를 함께하던 그 과묵한 선배와도  친해질 수 있게 되었다.


난 참 유머 있는 사람을 좋아했다.

이 과묵한 선배는 평상시엔 아주 말없이 조용했지만, 술만 들어가면 다른 사람이 되었다. 업이 된 목소리로 분위기 메이커가 되어 재미있는 이야기를 술술 풀어냈다. 그 선배가 참석한 술자리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면 민망할 수도 있는 19금 이야기를 어찌 그렇게 재미있게 풀어내는지. 동아리 내에서의 개그맨 신동엽 님과 같은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평상시 너무 과묵한 나머지 이토록 재미있는 선배인지 몰랐다. 그렇게 동아리 연습과 술자리가 지속됐다. 댄스동아리 사람들은 노래방 가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며 춤추는 걸 좋아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 많은 술자리가 있음에도 단 한 번도 노래방을 간 적이 없었다. 반대로 고등학교 연극 동아리 사람들은 노래방을 참말로 좋아했다. “우리 발성 연습하러 가자.” 이 말은 즉슨, 노래방 가자는 말이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발성 연습하러 노래방을 그렇게도 많이 갔다. 이 사람들이 연극 동아리 사람인지, 댄스 동아리 사람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춤과 노래를 좋아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춤을 좋아하는 대학 댄스동아리 선배들은 단 한 번도 노래방을 언급한 적이 없었다. 평소 이런 점이 너무나도 궁금하던 참이었다. 어김없이 술자리가 끝나고, 과묵한 선배와 택시를 타고 귀가를 하던 중이었다.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선배에게 물었다.


“선배, 우리 동아리 사람들 노래방 싫어해요? 왜 술자리 하면서 노래방 가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

“왜? 노래방 가고 싶나? 노래방 갈까?”

순간, 어?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 당황한 기색으로

“아니, 그건 아닌데. 다들 춤을 좋아해서 노래방도 좋아할 것 같았는데 아닌가 해서요.”

“노래방 가고 싶으면, 갔다가 집에 가자.”

노래방을 가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노래방 가자는 선배의 말에 뭔가 모르게 “싫어요.”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단 둘이 노래방 가자는 선배의 말이 조금 기분이 좋은 듯했다. 기분 좋은 티를 내지 않으려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선배와 단 둘이 노래방을 갔다.


 



동아리 연습이 끝난 후, 동방에서 또 술파티가 열렸다.

여러 종류의 술, 막걸리 맥주, 소주가 있는 자리에 맛있는 치킨들과 과자들이 펼쳐져 있는 천국 세상이 나에게 시작이 되었다. 술을 마시기도 전에 한 손에 프라이드치킨, 한 손엔 양념치킨을 들고 번갈아 가며 미친 듯이 먹어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두바이 선배가 “와 미니 먹는 거 봐라. 식겁한다.”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우리 1학년 때, 술이 너무 먹고 싶은데 돈이 없어가지고, 가지고 있는 동전 모아 가 소주 1병 사서 깡소주 마시고, 다 같이 우리 집에 가가꼬 술이 떡이 되게 마시고 다 퍼질러 자고 있었는데, 아침에 엄마가 우리 보시 더니, “와 소는 키아도 얘네는 못 키우겠다.”라고 하셨거든. 미니 보니깐 완전 소다 소.”

나의 옆으로 술자리에 자주 참석했던 영문학과의 머리 노란 동기 친구와 키가 큰 친구가 같이 앉아있었다.

“너네 먹는 거 보이 식겁하겠디. 너네 소해라. 미니는 머리 까마니깐 ‘한우’, 지혜는 머리 노라니까 ‘LA소’, 민주는 키 크니까 ‘엄마소’하면 되겠네. 소띠였던 우리에게 참 어울리는 별명이 생겼다. 이후로 나머지 두 친구는 ‘LA소’, ‘어미소’라고 잠깐 불러지고는 더 이상 불러지진 않았지만, 유일하게 나는 ‘한우’라는 별명으로 계속 불려지기 시작했다.




2학기에는 댄스동아리의 정기공연이 매년 있었다.

대학 입학 후, 처음으로 참석하게 된 정기공연이었다. 그동안 공연했던 곡들을 연습하며 조금은 고된 공연 연습이 이어지고 있던 2학기 기간이었다. 고된 연습에도 술자리는 끊이질 않았다. 어김없이 연습이 끝나고 동아리방에서의 술자리가 있었다. 자리를 잡고 앉아 눈앞에 펼쳐진 안주들에 사랑의 눈빛을 쏘아대며 한껏 기대된 마음으로 술자리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동방(동아리방)의 문이 열리고 늘 귀가를 같이하던 과묵한 선배가 들어왔다.

다들 술자리를 함께 하기 위해 왔다고 생각하며 자리를 내어주었다. 그 선배가 내어준 자리를 마다하더니 갑자기 나의 양어깨를 살포시 잡고 일으켜 세웠다.

“미니 잠시만 빌려갑니다.”라며 말을 꺼냈다. 순간 앉아있던 선배들이 “와~~~”라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무슨 일인가 어안이 벙벙했다.

“그런 건 아니고, 아무튼 잠시만 빌려갑니다.” 하며 나를 데리고 동방을 나섰다. 지금 나를 데리고 어디를 가는지도 모른 채 이게 무슨 일인지도  상황 판단이 전혀 되지 않았다.

“선배,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가보면 안다.”

선배는 끝까지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도착할 때까지 이 상황을 판단하기 바빴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 미니 왔나. 어서 온나. 앉아라.”

어디서 많이 본 사람들이다. 같은 과 선배들이 앉아 있었다.


알고 보니 해병대 전우회 사무실이었다. 우리 과 선배 중에 해병대 전우가 3명이나 있었다. 사무실에 앉아있던 과 선배들을 보니, 뭔가 모를 안도감이 느껴졌다. 안도감이라기보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판단하기 바빴던 내 마음이 더 이상 고민할 이유가 없어진 것에 대한 편안함이 더 맞는 것 같다. 선배들을 보자마자 마음이 이유 없이 편안해졌다. 아주 편해진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나의 철없는 친근함이 과 선배들 앞에서 무장 해제되어 해병대 전우회 사무실에서도 폭발을 했다.

나이가 제일 많았던 가수 MC몽을 닮은 선배, 그냥 보기만 해도 흐뭇해질 정도로 잘생기고 착했던 갓 제대한 예비역 선배, 그리고 과묵 선배와 절친인 동갑내기 배우 김영민을 똑 닮은 선배.

사진 출처 : 네이버 'MKZ의 세상 모든 이야기'


배우 김영민을 똑 닮은 선배가 분위기를 띄우며 입학 후 차마 아무도 입 밖에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마구 꺼내기 시작했다.


“미니, 입학 전 오티 때 대단했다. 얼마나 술을 먹었으면 앉아 있는 자리에서 오바이토를 해가꼬 내가 니 업어다 옮기고 그거 내가 다 치웠디. 아나? 내 고생 억쑤로 했디. 그때 (놀리듯 깔깔깔 웃는다)”

그 이야기를 듣던 선배들도 다 같이 웃었다.

“에이, 선배 그 이야기를 왜 또 꺼내고 그래요. 민망하구로.”

그 사무실의 술자리 분위기가 즐거워서였을까. 아님 안면이 철면피로 가득했던 나의 성향 때문이었을까.

말은 민망하다고 했지만, 나는 전혀 민망하지 않았다. 그저 술자리의 분위기를 올릴 수 있는 안주거리가 된 것이 마냥 기분 좋았다. 과묵했던 동아리 선배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한 고민도, 불안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나도 해병대 전우가 된 것 마냥 술과 분위기에 취해갔다. 그렇게 술자리의 분위기가 무러 익어가고 있을 때였다.


“00아(과묵한 선배를 부르며), 미니 야 괜찮다. 잘해봐라. 야 진짜 괜찮은 아이다.”

갑자기 대뜸 동갑 선배가 과묵한 선배와 나를 연결시키기 시작했다. 이 선배 왜 이러나 싶으면서도 괜스레 기분 나쁘진 않았다. 슬쩍 과묵한 선배의 표정을 살폈다. 그 상황이 너무 부담스럽고 싫었다면 표시가 날 법한데, 그리 싫다는 표정은 아닌 것 같다. 조금은 다행이란 생각으로 눈을 돌렸다.


그렇게 술에 한껏 취해 선배와 귀가를 했다.

우리 집이 있던 골목에 들어섰다. 쭈뼛쭈뼛하던 선배가 술 좀 깰 겸 잠시만 이야기하다 들어가자며 모퉁이에 자리 잡고 앉았다. 선배가 앉아있는 옆으로 살포시 자리 잡고 앉았다.

“우리 사귀자.”

전혀 상상도 못 했던 이야기이다. 다행히 기분이 나쁘거나 부담스럽진 않았다.


평소에 나는 남자에게 고백을 받으면 의심병이란 게 돋았다.

‘이 남자가 나를 좋아한다는 말은 진심이 아닐 거야. 분명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 일거야.’

잘생긴 남자한테서 고백을 받으면 이런 의심을 했다.

평소에 이성적으로 관심이 없던 사람이 호감을 표시해오면 끊임없이 거리감을 두기 시작했다. 남자에 대한 경계심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남자가 아닌 감정을 주고받는 이성에 대한 경계심은 왠지 모르겠지만 강하게 있는 편이었다. 그러나 선배의 고백은 당황스러우면서도 내심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기분 좋음의 내면에 그 의심병이 또 꿈틀대기 시작했다. ‘사귀자’고 이야기하는 선배의 혀가 정상은 아니었다. 꼬부라질 정도로 꼬부라져 이 사람이 진심으로 고백을 한 것인지, 술김에 하는 이야기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내 마음은 지금 당장 ‘그러자.’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그 의심병이 대답을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계속 대답을 머뭇거리는 나에게,

“내 그리 나쁜 사람아이다. 믿어도 된다.”라며 나를 안심시키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는 이 사람의 고백이 진심인지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다. 내일 술에서 깨면 기억을 못 할 수도 있다. 기억을 하더라도 후회하며 이불 퀵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 우선 지금 말고 내일 술 깨고 다시 이야기해요.”

그렇게 우리는 마무리를 짓지 않은 채 헤어졌다.




기분이 좋아 잠이나 제대로 잤을까.

혹여나 잠에서 깬 후, 나에게 고백을 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을까 봐 노심초사하며, 기분 좋음과 불안이 뒤섞인 아침을 맞이했다. 그러면서도 내심 제발 어제의 상황이 거짓 없이 기억하기를 바라고 바랬다. 등교를 했다. 과 친구들과 수업을 같이 들으면서도 내 마음은 이미 솔로를 탈출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한 가지 걸리는 부분이 생겨버렸다. 같이 다녔던 우리 여자 셋 멤버 중에 한 친구는 이미 학과장 선배와 공식 커플이었다. 솔로였던 나머지 둘이 솔로의 마음을 주고받고 있었는데, 나 마저 커플이 되면 홀로 솔로가 될 한 친구가 마음이 걸렸다. 내가 솔로탈출을 하게 될지 아닐지도 확신할 수 없던 내가 설레발을 쳤다.

수업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 친구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나 남친 생길 것 같애.”

“어? 와 미니. 남친 생겼단다.”

어찌나 그 목소리가 우렁찼던지 주변에 앉아있던 과 친구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야 말았다.

“우와~~ 미니. 축하한디. 이열~”

남자 동기들의 축하가 이어졌다. 민망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어떻게든 어제의 일을 선배가 기억하게 만들어야 된다. 조바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강의가 끝나고 동방에 가는 길,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아, 선배가 기억 못 하면 어떡하지…?”




무거운 마음으로 동아리방을 향했다.

선배가 동방에 앉아 있었다.

“선배, 잠깐 나가서 이야기 좀 할까요?”

선배는 두 말없이 나를 따라 나왔다. 모퉁이에 자리 잡고 앉았다.

“선배, 속은 좀 어때요? 괜찮아요?”

“아, 진짜 죽겠다. 어제 너무 많이 마셨는가 보다. 니는? 괜찮나?”

“네. 저는 괜찮아요.”

쉽사리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아주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을 깨고 선배가 먼저 말을 이어갔다.

“어제 이야기했던 거 고민 좀 해 봤나?”

무엇을 물어보는지 뻔히 알았지만, 어제 술자리에서 한 이야기가 아주 많았다. 수수께끼라도 내듯 되물었다.

“어제 이야기. 뭐 어떤 거요?”

“사귀자고 한 거”

다행이다. 기억하고 있었다.

“아, 선배 기억나요? 나는 선배가 술김에 그냥 한 이야기인 줄 알고요.”

“술 김에 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 이야기를 술김에 하겠나. 술김에 한 거 아니니깐 그리 생각하지 마라.”

“저는 술김에 한 거면 기억 못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술 깨고 맨 정신에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술김에 짧게 생각하고 꺼낸 이야기는 아니었다. 내가 나이도 많고 니는 너무 어리고 이레도 되나 싶어서 오래 고민했었다. 나도 확 김에 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래서. 생각해봤어?”

대답 대신 아주 쑥스러움이 담긴 고개로 끄덕이며 대답헸다.

내가 관심 있는 사람에게 고백을 받는 상황은 진짜 일어나기 힘들다고들 한다. 그런 일이 일어났다. 나에게.


그렇게 우리는 공식 커플이 되었다. 동아리 사람들은 모르게, 과 동기들은 다 아는 공식 커플이었다. 동아리 사람들이 다 알게 되기까지 비밀 연애는 고작 한 달. 그동안 있었던 술자리에서 늘 귀가를 같이 하는 모습을 보고 멤버들은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던 터였다. 그렇게 한 달간의 비밀 연애를 끝으로 공식 캠퍼스 커플이 되었다.


늘 내 마음에 자리를 잡은 남자와는 짝사랑으로 끝났던 나에게 처음 사랑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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