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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vecin May 04. 2024

* 쓸데없는 건 기억하고 있어(2024.05.04.토)

쓸데없는 건 기억하고 있어 (2024.05.04.) *   

  

 - 쓸데없는 건 기억하고 있어.     


  수업이 끝난 후, 음악실 정리하는 아이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 중학교 때 음악 수행평가는 어떤 것을 보았나요?

 - 곡 제목 알아맞히는 음악감상 시험 봤어요.

 - 소금 연주했어요.

 - 교가 노래 시험 봤습니다.

 - 2학기 때 기악 시험, 재미있을 것 같아요.

 - 재미있지는 않을걸요.

 - 선배들이 힘들지만, 재미있다던데요?     


  논술형 시험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 논술형 시험은 어떠했을까요?

 - 서양음악사랑 국악사에 관한 내용으로 시험 봤어요.

 - 힘들었겠네요.

 - 네. 했었는데 지금은 하나도 모르겠어요.

 - 맞아요. 외우는 시험은 그 시간만 지나면 하나도 기억 안 나요.

 - 암기과목은 모두 다 그렇죠. 대부분 기억이 안 나는 게 당연하죠.     


  아이들은 이렇게 마무리했다.     


 - <할렐루야>는 나중에 기억이 안 날 수가 없을 거예요.

 - 선배들도 같이 노래하면서 지나가던데요?     


  이미 지나간 과거와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하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해 보았다.     


 - 선배들이, 후배들은 <할렐루야>를 외워서 시험 보게 해 달라고 했었는데!

 - (큰 목소리로) 안 돼요!

 - 왜요? 다들 악보도 안 보고 잘들 노래하고 있던데?

 - 악보 안 보고 시험을 보면 머릿속이 하얘질 거예요!

 - 맞아요!


    옛날 어느 해에는 <할렐루야>를 외워서 시험을 봤던 적이 딱 한 번 있었지만, 그 후로는 외워서 시험을 보지는 않는다. 이유는 단 하나! ‘보기에 예쁘지 않아서!’. 외워서 노래하는 모습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악보를 들고 노래하는 모습이 훨씬 더 예뻤다. 동산콘서트콰이어에서나 교사 성가를 할 때도 악보를 들고 노래하는 모습이 나에게는 더 아름답게 보인다. 그래서 지난달 교향악 축제에서 A 지휘자가 보면대에 아무것도 없이 30분이 넘는 B 곡을 외워서 지휘했던 모습은 내 눈에는 좋아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연주하는 내내 나에게 불안감을 주었었다. 물론 대단한 기억력과 도전력에 경탄하며 꽤 긴 시간 동안 큰 박수를 보냈지만 말이다.

     

  C 선생님과 대화 중에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 선생님이 다녔던 대학원이 D 대학원이잖아요?

 - 별걸 다 기억하고 있네요.

 - 그러니까요. 그런 게 기억이 나네요, 지금.

 - 아주아주 오래전인데.

 - 그때 선생님이 제 옆 반, (1-2) 담임이었고, 대금 배우러 다니고 있었는데….

 - 진짜, 별걸 다 기억하고 있네요….

 - 왜 그런 게 다 기억이 나죠??     


  아주아주 오래전의 이야기인데, 갑자기 이런 것들이 확 떠오르는 때가 있다. 나와 별로 상관이 없는 일인데 너무도 또렷하게 떠오르는 그 무엇들…. 이어지는 대화.     


 - C 선생님이 의외로 음악에 관해 관심이 있는 것 같아요.

 - 관심은 있지만, 음악에 대해 전혀 몰라서 좀 알아야겠다는 생각으로 평상시에 클래식 음악을 듣는데, 여전히 잘 모르겠어요.

 - 진.짜.요?? 언제부터요?

 - 선생님(나)이 나에게 선물해 주었던 책, <박종호의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이라는 책을 보면서 음악에 대해 좀 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 제가 그런 책을 선물했었다고요?? 선생님이 나에게 <모모>라는 책이랑, <반 고흐>에 대한 책을 생일선물로 주었던 것은 기억하고 있어요.

 - 정말, 필요한 건 기억하지 못하고, 쓸데없는 건 기억하고 있네요. 하하하!

 - (모두) 하하하!

 - 박종호 씨는 의사이면서 오페라 전문가인데, 그 사람이 쓴 책을 선물로 주었다니, 어려웠겠어요.

 - 어려웠지만 도움이 되었어요.

 - 그럼, 평상시에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듣는 음악이? 

 - 네. KBS 클래식 라디오를 들어요.

 - 와우! 그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동료 선생님에게 책을 선물로 받았던 것이 신선해서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C에게 책을 선물했다는 것은 왜 그렇게 낯설었을까? 그 책이 C를 음악의 세계로 인도했다니 더 놀라울 뿐이다. 받은 것은 기억하고 준 것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일 듯.     


  방송에서 어머니에게 보내는 메시지라며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 엄마! 나도 알아보지 못하고 남동생도 알아보지 못해서 속상했어. 하지만 ‘예수님은 기억나?’라고 물어보았을 때, ‘아, 예수님! 나를 집에 데려다주실 분!’이라고 해서 정말 다행이야. 나랑 남동생은 몰라도, 예수님을 기억하고 있으면 된 거지! 엄마, 천국에서 만나!     


  치매에 걸린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운 이야기에 출근하던 내 눈에서는 눈물이 와르르 흘러내렸다. 다른 사람은 기억하지 못해도 예수님은 기억하고 있다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구나’ 싶었다.     


  인간의 정신 능력은 사고능력, 기억력, 이해력, 추리력, 계산력, 창의력 등의 이성 능력과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인내심, 지구력, 충동억제력, 만족지연 능력, 용기 절제, 감정 이입 능력 등의 정서 능력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이 많은 능력 중 우선적으로 갖추었으면 하는 능력은 무엇일까. 학문적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이해력과 기억력이 아닐까 싶다. 이해하고 기억하기부터 공부가 시작되니까. 물론 어떤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아서 일단 외우는 것부터 하는 아이들도 있으니, 기억력이 이해력보다 더 낮은 수준일 수 있겠다.  

   

  어떤 것을 기억해야 할까. 사실 꼭 필요한 것들만 기억하면 좋겠는데, 혹시 쓸데없는 것들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되기도 한다.    

 

  좋았던 것들, 감사했던 것들, 받았던 것들. 아름답고 예쁜 것들, 사랑했던 사람, 그 감정들은 모두 다 기억하고, 아프고 슬프고 나빴던 것들, 주었던 것들, 잊어도 되는 것들, 잊으면 더 좋은 것들은 머릿속에서 사라지면 좋을 텐데…. 아니면, 아프고 슬프고 나빴던 것들, 주었던 것들, 잊어도 되는 것들, 잊으면 더 좋은 것들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고, 좋았던 것들, 감사했던 것들, 받았던 것들, 아름답고 예쁜 것들 그리고 사랑했던 사람과 그 감정들은 더 확실하게 각인되어 버리면 정말 좋을 텐데!


 - 쓸데없는 건 기억하고 있어.     


  쓸데없는 걸 기억하고 있더라도, 쓸데없는 것만 더 잘 기억하고 있더라도, 슬프고 아팠던 것들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지기를 그리고, 다 잊어버리더라도 사랑했던 기억과 감정과 사람은 남아있기를.      


  무엇보다 과거에 대한 기억은 좀 더 아름답게 기억되기를. 

  과거는 아름답게 회상되니까.     


  기억은, 과거에 대한 거니까.     


  ************


*** 2024학년도 1학기 1차 지필고사가 끝났다.     


  5월에 시험이 끝났던 적도 없었고, 시험이 끝나자마자 연휴였던 적도 없었던 듯하다.      


  처음 시험이어서 그런지, 시험이 제법 쉬웠나 보다.     


  점수는 높아도 등수가 걱정되겠지만 일단, 시험이 끝났다는 것과 연휴라는 것에 아이들이 모두 환호하니 다행이다.     


  아이들 말처럼, 애써서 공부했는데, 벌써 다 까먹어버린 것은 아니기를 바라며.     


  1차 지필고사가 끝난 날, 어느 학급에 쓰여 있었던 글귀 하나.     


  1차가 끝났지만, 곧바로 2차 시험 준비를 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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