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야블라썸 Apr 12. 2023

사랑인지, 연민인지, 욕구인지...

#12. 토요일, 저녁 7시

이제는 부쩍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 데, 또 연희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선우는 기말고사 처리로 바빴던 연말을 마무리 지으며 겨울방학을 맞았다. 간간히 연희가 생각났지만, 바쁜 시간에 떠밀려 겨우겨우 연희를 잊은 듯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방학을 맞고서야 선우는 알았다. 다른 그 어떤 겨울보다도 더 매섭고도 춥게 느껴진다는 것을... 연락 없는 연희를 기다리며, 자신이 먼저 해 볼까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전남친이 결혼을 했다는 후배 민아의 말이 떠올랐다. 아직도 연희에게는 마음 정리를 할 시간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에 이르자 선우는 다시 무기력해졌다. 지금의 이 감정이 연희를 향한 진정한 사랑인지, 연민인지, 아니면 일종의 욕구인지 헷갈렸다. 분명한 건, 연희가 보고 싶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무작정 차를 몰고 나왔다. 드라이브만 잠시 하고 들어와야겠다고 시작된 운전은 연희와 달콤함을 나눴던 그 장소에서 멈췄다.


토요일, 저녁 7시.

지성대학교 교양강의동 주차장.


'에휴, 나 지금 뭐 하냐?'


혼자서 추억놀이라도 하려는 듯, 고작 세 번의 만남이 전부인 연희를 생각했다. 세 번 중 두 번의 만남은 이 시간, 여기에서 일어났음을 기억했다.


'연희는 왜 여기를 그렇게 좋아했지?'


갑자기, 장소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차에서 내려, 1월이라 벌거벗긴 했어도 크고 작은 나무들이 제법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주차장 뒤의 숲을 구경하러 나섰다. 누렇게 볼품없이 말라버린 잔디 사이로 징검다리처럼 박혀있는 돌을 밟으며 숲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공원처럼, 돌길 따라 두 편으로 나눠진 잔디밭에는 드문드문 제법 큰 아름드리 나무들이 있었고, 그 나무 밑을 벤치들이 지키고 있었다. 마치,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공간의 가로등 불빛이 참으로 쓸쓸하게 느껴졌다.


"봄 돼서 꽃피면, 제법이겠는 걸?"


선우는 고즈넉하게 외로운 숲에게 말이라도 거는 듯, 혼자 중얼거렸다. 그때, 나무에 가려, 있는 줄도 몰랐던 사람의 형체가 빼죽이 얼굴을 내밀었다.


"앗! 깜짝이야."


선우는 지레 놀라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선, 우, 씨?"


뒤를 돌아본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름 아닌 연희였다.


"연희 씨예요?"


겨우 '씨'자를 떼고 가까워졌던 거리는 한 달을 못 본새 원래대로 거리가 벌어졌다.


"연희 씨가 기 웬일이에요?"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이네요. 저는 여기가 저희 동네나 다름없어서 그렇다지만, 선우 씨는 진짜 여기 웬일이에요?"


"아, 저는 뭐..."


선우는 둘러댈 변명을 찾지 못했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로또 당첨의 횡재라도 한 듯 가슴이 벅차올랐다.


'참 많이 보고 싶었어요. 연희 씨.'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는 말을 결코 뱉지 못한 채, 연희 옆으로 다가가 둘은 다시 그 벤치에 앉았다.


"겨우, 말 텄는 데, 다시 원점이 됐네요."


"그러네요. 아쉬워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선우를 바라보는 연희의 눈빛을 느꼈지만, 선우는 차마 연희를 바라보지도, 묻는 말에 답변하지도 못했다.


"......"


"저는 살짝 아쉽네요."


아쉽다는 말에 선우가 고개를 돌리자, 연희의 입술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심호흡을 들이켜다 내뱉으며 천천히 그 입술을 바라보았다. 새초롬하게 다물어진 연희의 입술이 살짝 오므렸다 펴지더니, 연희도 지긋이 선우의 입술을 바라보다가 슬며시 눈을 감았다. 1월의 차가운 저녁 공기는 두 사람을 견고하게 결합시키기에 적절했다. 가로등 불빛 아래의 밤처럼 까만 길다란 그림자는 하나로 포개어진 채, 조금은 뚱뚱한 한 사람이 벤치에 앉아있는 듯한 형상으로 바뀌었다.


보고픔을 견딘 시간만큼이나 떨어질 줄 모르던 하나의 그림자가 다시 두 개가 되었다.


"연희 씨는 이 장소를 왜 이렇게 좋아하는지 물어봐도 돼요?"


"지금 겨울이라 그렇지, 봄이 되고 꽃이 피면, 여기 너무 이쁜 장소예요. 여름에 파란 잔디 보며, 나무 밑 그늘에 앉아있는 것도 좋고요. 가을에 낙엽 지는 것 보는 것도 매력적인 장소예요. 그렇게 이쁜 풍경 보면서 멍 때리면,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에요."


차마, 여기서 기준의 고백을 받았다고 말하지는 못했다. 벚꽃 만발하던 4월, 봄바람에 벚꽃 잎이 처럼 내리던 이 나무 아래에서 같은 과 여학생들의 설렘이었던 기준 선배가 자신에게 고백했던 그날을 연희는 아직도 잊지 못했다.   


내리던 벚꽃 보다도 기준 선배의 고백이 더 아름답게 느껴졌던 4월의 그날. 그날의 떨림 때문에 이 장소가 아름다운 거라고 연희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이 추억보다 더 아름다울 무엇이 있어야 할 텐데... 애써 잊으려 하면 할수록, 더 선명하게 그날의 기준이 떠올랐다. 절대 헤어지는 일 없을 거라고 장담하던 그 남자. 그럼에도 쉽게 포기했던 그 남자. 이제는 저 멀리 건널 수 없는 강을 홀로 먼저 건너가버린 그 남자. 가지지 못하여 더 간절할 지도 모를 그 남자.


그 남자가 보고플 때면, 연희는 이렇게 이 벤치를 찾았다.


"겨울에는 매력 없나요?"


"아, 겨울은 앙상한 나무들만 있어서 조금 그렇죠? 꽃도 없고, 잔디도 이렇게 병든 것 같고... 눈이 오면 이쁘려나?"


"제가 눈을 내리게 해주고 싶네요. 이 겨울도 이뻐 보이게..."


선우의 진심이었다. 겨울에 이렇게 쓸쓸히 앉은 연희를 떠올리는 것이 힘들 것만 같아서, 겨울에도 이쁘게 보일 추억을 함께 만들어 보자고 진심 어린 고백을 할 뻔했다. 토요일 저녁, 혼자 텅 빈 숲을 지키는 연희가 너무 안쓰러워서. 너무 쓸쓸해 보여서. 너무 가련해 보여서...


"혹여나 다음에도 오늘처럼 혼자이면, 저에게 연락 줘요. 무슨 일이 있어도 달려올께요."


"지금 그 말, 제가 친구 없어 보인다는 말이죠? 하하. 저, 친구 있거든요."


"저는 그 친구 중에 한 명 아닌가요?"


"그쵸. 우리 친구죠. 선우야?"


"그래, 연희야. 심심하면 연락해."


진심을 농담으로 웃어넘기며 어색함을 갈무리했다. 친구라고 우겨야 겨우 친구가 되는 이 관계. 그러면서도, 입은 맞추는 관계. 대체, 이 관계를 뭐라 해야 할 까?  

매거진의 이전글 토요일은 밤이 좋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