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정류장 사무실 앞 벤치.
연희 어깨까지 내려앉은 어둠이 사무실 불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12월의 바람은 차갑고도 모질었다. 몸속의 뜨거운 기운을 손바닥에 뱉어내며 입김으로 손을 데웠다. 그럼에도, 혼자 앉아 선우를 기다리는 연희의 손과 발은 이내 싸늘해져서, 어깨가 덜덜 떨렸다. 얼마를 떨었을까?
연희의 덜덜 떨리는 어깨 위로 무겁지 않은 모직 코트가 살포시 올려졌다.
"많이 기다렸어요? 토요일 저녁이라 맘처럼 길이 안 뚫리더라고요."
그제야, 연희는 뒤를 돌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선우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아! 죄송해요. 토요일이라 쉬고 있었을 텐데..."
"추워요. 그만 떨고, 얼른 제 차 타요."
무슨 일이냐고 한번 물어봄 직도 한데, 선우는 묻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일을 해결하기보다 지금 눈앞에 떨고 있는 그녀의 추위를 해결해 주는 게 더 시급한 문제 같았다. 선우는 늘 그런 식이었다. 당장 눈에 보이고, 당장 그녀가 원하는 일, 그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차만 타도 이렇게 따뜻하죠? 조금 있으면 더 따뜻해질 거예요."
"네에~. 고마워요."
낮에 만난 사람과 확연하게 온도차가 느껴졌다. 따뜻한 카페 안에 있어도 연희를 차갑게 만들어 버리던 냉혈한 같은 남자와 추운 겨울바람에도 연희를 따뜻하게 녹여버리는 온난로 같은 남자. 세상에는 이렇게 두 종류의 남자가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기준 같은 남자도 있었다.
연희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순간에도 기준을 떠올리다니... 연희의 고개질에 선우는 놀라 쳐다봤다.
"괜찮아요? 어디 안 좋은 거 아니에요?"
"아! 아니에요. 잠시 딴생각을... 사실, 저 오늘 소개팅했었어요. 아니, 선봤다는 말이 맞으려나?"
"네에? 선이라뇨?"
"아! 교감쌤이 친구 아들 한번 만나보라는 데, 거절을 못해서... 근데, 만남 도중에 뛰쳐나와버려서, 더 욕먹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차라리, 만나기 전에 거절을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중간에 뛰쳐나왔어요? 난, 그 사람이 더 궁금하네요. 하하하."
"그쵸? 완전 딴 세계 사람...이었어요. 훗"
선우의 나긋나긋한 말에 오늘의 아픈 만남이 따뜻한 웃음이 되었다. 나긋함이 기준 선배를 닮았다. 아니, 선우 씨가 더 나긋한가? 자꾸 다른 남자에게서 습관처럼 기준의 모습을 찾는 연희 자신이 못나 보여서 선우를 바라보지 못하고 차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로 집으로 가면 되겠죠?"
"아니에요. 아직 7시도 안 되었는 데, 모교로 가요. 제가 밥 살게요."
알록달록한 네온사인이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도로를 따라, 선우의 차가 대학교 정문으로 들어섰다.
"교양강의동에 주차하는 거 어때요?"
"네?"
뭔가 데자뷰되는 것 같은 느낌에 선우는 흠칫 놀라, 진심이냐는 듯 고개를 사선으로 돌리며 연희를 쳐다보았다.
"저는 거기가 편해요."
선우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차는 천천히 미끄러져 교양강의동 앞에서 이내 멈췄지만, 선우의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었다. 이 다음 일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그려져서...
'제발, 내 망상이었으면 좋겠다. 오늘은 아니겠지? 근데, 심장아, 왜 이렇게 나대니?'
차가 멈추고 사이드 브레이크가 걸리자, 연희가 바로 대담하게 돌진해 왔다. 오늘의 일에 감사하는 마음이라도 담은 듯, 차 안에서 겨우 데워진 볼과 입술이 선우가 버스 종점 벤치에 앉았던 그녀를 봤을 때와는 달리 뜨거웠다.
선우의 심장은 최고조로 박동해서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이내 차창문은 두 사람의 온기로 밤안개라도 내린 듯 뿌옇게 흐려져서, 차 안의 두 검은 그림자를 가려주었다.
토요일, 저녁 7시.
- 일곱 시 정각을 알려드립니다. 뚜 뚜 뚜 뚜~
정각을 알리는 라디오 소리만 관객처럼 남아 두 남녀를 에워싸서 바라보고 있었다.
꼬르륵. 꼬르르르.
연희의 뱃속에서 배고픔을 참지 못한 위가 아우성쳤다. 이 소리 하나에 진지하던 둘은 웃고 말았다.
"파하하하."
"푸훗. 웃지 말아요. 부끄럽게..."
"얼른, 밥이나 먹으러 가요. 진짜, 사주는 거 맞죠?"
"제가요?"
"네~에?"
어이없다는 듯 선우가 입을 벌리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모습이 오늘도 귀엽게 보였다. 순간 선우가 귀엽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에 제 스스로 놀라 연희는 얼른 차에서 내렸다. 오늘은 조금 더 선우 가까이에서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동시에, 차에서 내린 선우 옆에 연희가 가까이 다가섰다. 아직도, 함께 했던 공간 밖으로만 나오면 금세 어색해지는 둘 사이지만, 오늘은 연희가 조금 더 가까이 섰기 때문일까? 선우가 연희 키에 맞도록 고개를 숙여, 연희 귓가에 속살거렸다.
"저, 사실 연희 씨에게 말 안 한 게 하나 있는데요?"
"아주 비밀스러운 거예요?"
연희의 호기심 어린 시선 안으로 선우의 얼굴이 크게 클로즈업되며 다가왔다.
"저, 사실 연희 씨랑 동갑이에요."
또, 연희 귀를 간지럽히며 귓속말을 했다.
"네~에?"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에요? 제가 빠른 93년생이라서요. 여튼, 우리 동갑이라고요."
"하마터면, 오빠라고 할 뻔. 동갑 기념 말 놓기 선물권 드려요."
"반.갑.다, 친.구.야."
"어~, 그래. 반갑다, 친구야"
말을 튼 순간이 어색하면서도 친구라는 말이 주는 반가움에 또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말의 벽이 낮아진 만큼, 서 있는 두 사람의 거리도 한결 가까워졌다. 연희의 어깨와 선우의 팔이 닿을락 말락. 학교 정문으로 걸어 나오며, 둘 사이의 보이지 않던 어색함의 벽은 오늘로써 완전히 허물어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