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를 만난 다음날 아침, 동호회 모임을 마치고 나오는 데, 동희 형이 선우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이야기했다.
"뭐가?"
"너 한 번씩 얼굴 혈색은 좋은데, 눈은 슬퍼 보이는 거 알아?"
"그게 모야? 얼굴 혈색 좋으면, 눈도 이글이글 불타고 있겠지."
"아냐, 아냐, 분명 뭔가 있다."
"뭐, 공원 앞에 자리라도 펴지, 그냥."
"그러지 말고, 너 사람 좀 만나고 그래. 젊은 녀석이 넘 건조하게 사는 거 같어."
"건조하긴, 누가? 내가? 나 엄청 촉촉해. 너무 촉촉해서, 좀 드라이하게 살고 싶거든."
"어휴, 그게 아직 서른도 안 된 놈이 할 소리야? 지금은 이래저래 여자도 많이 만나고 그럴 나이인데... 너 혹시 거기 문제없지?"
"아, 또 뭔 말이야? 학교에서 마주치는 선배 선생님들마다 사람 소개해준다고 해서 좀 피곤해."
"그런, 사람들하고 나는 다르지. 니 여자는 형이 소개해줄게."
"아니, 고맙지만 거절할게."
"거절을 거절한다. 그러지 말고, 한번 만나봐. 혜린이 동생이 또 그리 이쁘다. 언니 닮아서... 하하"
"뭐어? 형이랑 동서관계?"
"사실, 지난번에 울 동호회에 혜린이 왔었잖아. 너 보더니 괜찮다고, 자기 동생 소개해달래."
"형수님이?"
"그래. 제발, 좀 만나봐. 너 총각으로 고독사할까 봐 내가 그냥 애가 탄다."
동희는 선우의 눈동자에서 예전과 다른 슬픔을 느꼈다. 이제는 직장이 안정된 만큼, 이성도 만나고 다른 청춘처럼 주말도 바쁘게, 조금은 말랑하게 살길 바라는 데, 건조해 보이는 선우의 생활이 못내 안타까웠다.
비단, 동희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었다.
고등학교의 겨울 방학은 교사에게 학생생활기록부 작성이라는 숙제를 교사들에게 주는 계절이었다. 최근의 입시 흐름에 따라 방학 아니면도저히 처리할 수 없을 정도로 생기부 작성 하나만으로도 버거운 업무였다. 특히, 선우와 같은 초짜에게는 초고도의 집중과 공부를 요하는 작업이었다.
떠밀린 숙제를 하고자, 학교를 찾으면 많은 선생님들이 여름 방학과는 달리 학교에 나오셨다. 방학이다 보니 조금은 자유롭게 출퇴근하는 교사들이 틈만 나면, 선우에게 들러 소개팅을 권했다.
생기부 작성을 핑계로 겨우겨우 빠져나오면, 한가해지면 보자는 식으로 그들의 소개는 집요하게 계속되었다. 이럴 때면, 차라리 실체가 없는 그 누군가 있다고 말해버리는 게 낫겠다 싶다가도, 혹여나 좁은 이 바닥에 엉뚱한 소문이라도 날까 봐 그마저도 말하지 못했다.
그럴 때면, 연희가 더 간절해졌다. 얼른, 그녀의 남자가 되고 싶었다. 그녀에게로 가는 길은 미로처럼 꼬여 있어, 한번 잘못 들어서면 다시 되돌아 나와야 제 길을 찾아갈 수 있는 거지만...
선우와 달리, 중학교에 근무하는 연희는 방학이 오히려 비교적 여유로웠다. 차라리, 교사가 아니었으면, 이 겨울 방학에는 가정 경제에 조금이라도 더 보탬이 되도록 알바라도 하고 싶었다. 그나마, 아버지의 병간호를 그녀가 떠맡아 할 수 있어서, 지친 엄마를 쉬게 해 드릴 수 있다는 게 조금 위안이 될 뿐이었다.
하지만, 연희의 엄마, 김여사는 많이 쉬지를 못하고 또 일자리 전선으로 뛰어들었다. 남편 빚과 병간호를 위해 가게를 접기 전까지만 해도 미용실 원장소릴 듣던 그녀였다. 이젠 가게가 없지만, 기술은 남아서 이렇게 짬이 날 때면, 쉽게 일할 자리가 많았다.
"김여사, 나 믿고 며칠이라도 좀 더 쉬지?"
"나는 쉬면 좀 쑤셔서 안 돼. 일해야지, 돈 벌어야지. 쉬면 뭐 돈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
"에휴, 딸이 벌고 있잖어."
"흐이구. 그래도,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이 생활 얼른 청산하지."
"이 생활이 어때서? 며칠 쉰다고 덧나나?"
"그래, 덧난다. 하하. 일거리 생겼을 때 해야지. 다녀올게."
김여사는 연희 때문에 더 힘을 내어 집을 나섰다. 다행히, 집 가까이 대학가라 미용실이 많았다. 남편 때문에 가게만 안 날렸어도, 저 많은 미용실 중에 하나는 당당히 차지하고 있었을 김여사.
그래도, 그녀는 나이가 들어도 일할 수 있는 기술이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그깟 '원장' 타이틀 안 해 본 것도 아니고,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하면, 언젠가 다시 가게 하나 꾸릴 수 있을 거라는 희망도 집념도 있었다.
가게에 앉아 머리를 하러 오는 청춘들을 볼 때면, 김여사는 연희에게 많이 미안했다.
'이렇게 이쁘게 머리도 하고, 멋도 좀 부리면서, 재미나게 살아야 할 나이인데, 병원에나 쳐 박혀서 아비 병간호나 하고 있으니...'
가끔, 연희 또래의 젊은이들 머리를 만질 때면, 병실에서 송장 같은 아비만 바라보고 있을 연희가 떠올라 가슴이 미어졌다.
최근, 일 년간 사귄다던 남친 이야기를 전혀 안 하는 연희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느꼈지만, 아는 척할 틈도 없이 살아야만 해서 연희에게 더 미안했다.
'제발, 착하고 사랑 많은 남자, 지 하나 끔찍이 사랑해 줄 좋은 사람 만나야 될 텐데...'
한편, 연희는 병실에 앉아 꼼짝 않고 누워만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혼자서는 숨도 잘 못 쉬어 기계에 의존하고 있는 신세였다. 욕창이 생길까 봐, 여린 몸으로 아빠의 몸을 뒤집어 닦을 때면, 숨이 절로 가빠졌다.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도, 오랜 침상생활로 근육하나 없이 뼈만 앙상하게 남아버린 아버지 다리를 볼 때면, 투자를 잘못하여 딸 인생을 힘들게 한다고 푸념을 털어놓았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래도, 그런 아빠라도 있어서 세상이 함부로 자신을 무시하지 못했음을 이제서야 어렴풋이 세상을 알게 되었다.
비록 건축업 일용직으로 전전하긴 했어도, 가장으로서는 최선을 다했고, 무엇보다도 연희를 끔찍이 아껴주었다.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아빠와 함께 있을 때면 연희는 차가운 마룻바닥에 그냥 앉아 본 적이 없었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아버지 무르팍이 연희 전용 소파였다. 늘 가게에 나가는 엄마를 대신해, 불규칙적이었지만 연희와 함께 해주려고 애쓰던 아버지.
나즈막한 거실장 위에 오래된 TV 한대와 그 옆 폭 90센티 정도밖에 안 되는 책꽂이 하나에 3인용 소파 하나뿐인 단촐한 거실. 어린 연희는 아버지의 무르팍에 앉아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동화책을 읽어주는 아버지를 좋아했었다. 가끔 동화가 지루할 때면, 꺼끌한 아버지의 턱을 만지곤 했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눈치를 채고 TV 어린이 프로를 틀어주곤 했었는 데, TV를 보다 궁금한 것만 발견하면 "아빠, 저거 왜 저런 거야? 이건 또 왜 이래? 왜?"라고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묻곤 했었다.
어른의 눈에는 너무나도 당연한데, 어린 연희의 눈에는 참으로 이상하게 보이던 황당한 질문을 하여도 어떻게든 답을 만들어 대답을 해주던 아버지. 가방끈이 짧아도 인내심은 짧지 않은 멋진 아버지였고, 늘 연희의 수준에 맞게 말벗이 되어 주었던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가 이제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을 뿐.
처음,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자기 원망 때문에 아버지가 쓰러진 것 같아서, 한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 기준과 어쩔 수 없이 비교되는 가정 형편의 모든 책임을 아버지 탓으로만 돌렸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도 분명 꽃처럼 피었던 적이 있는 인생임을 모르지 않았다.
살아온 인생이 짧아, 역사 시간에 배운 하나의 국가에만 흥망성쇠가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한 개인에게도 흥망성쇠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순간에 원장에서 일개 디자이너로 전락한 김여사만 봐도, 일순간에 건강을 저버리고 말 한마디 못하는 채 병실에 몸져누운 아버지만 봐도, 결혼으로 결실 맺을 것 같은 사랑이 일순간에 이별로 끝나버린 자신을 봐도, 어느 인생 하나 흥하기만 하는 인생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만 자는 듯 고요한 아버지의 수종을 들며, 침대 옆 창밖을 바라보는 일은 작년 한 해를 돌아보기에도 좋은 시간이었다. 연희는 임용고시에 합격했고, 아버지는 쓰러지셨고, 김여사는 가게를 정리했고, 그 후 연희는 기준과 헤어졌다.
기준의 생각에 이르게 되면, 여전히 다른 생각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그 생각에 머물러 가슴을 쓸어내렸다.
작년 한 해의 이야기가 기준과 헤어진 것으로만 끝나는 게 아닌데, 더 이상의 세월을 살지 않은 듯 멈춰있는 자신의 시간에 연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겨울이 유독 춥게 느껴지는 건, 최근 3년의 겨울을 함께 했던 기준이 옆에 없어서일까? 그러고 보니, 결혼 후 도통 기준의 연락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이제 자신만 기준을 내려놓으면 둘 사이가 완전히 끝난다고 다시 마음을 다독였다.
돌이켜보면, 기준과 헤어진 이후로 좋은 일도 있었다. 드디어, 직장 생활을 시작했고, 학자금 대출도 갚기 시작했으며, 처음 시작된 교사 생활은 서툴러도 자신을 따르는 학생들과의 소통이 너무 즐거웠다. 아버지의 병원 생활에도 조금은 익숙해져서, 김여사도 자신도 씩씩하게 하루를 버텨냈음이 대견하게 느껴졌다. 넉넉하진 않지만, 그래도 떳떳하게 열심히 꽤 잘 살고 있는 삶인데, 못 사는 삶인 듯 누가 우리를 함부로 평가하는 가?
연희와 연희 가정을 함부로 평가하려 했던 사람들이 떠올라 잠시 불쾌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음이 떠올랐다.
선우.
김선우.
하얀 미소로 연희에게 다가왔던 그 남자. 연희가 눈물을 흘릴 때면, 여지없이 연희 옆에 있었던 그 남자. 차가운 겨울바람에도 난로처럼 따뜻하게 곁을 내주던 그 남자. 문득, 그가 떠올랐다.
자신의 행동에 아무런 이유도 묻지 않고, 왜 그러냐고 따지지도 않던 그 남자. 그저, 자신의 편이 되어주었던 그 남자. 이제야 그가 참 따뜻한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되었다. 그런 깨달음도 잠시, 그와 동시에, 그에게 했던 연희의 무례함이 떠올랐다.
그런 남자에게 자신은 진정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리며, 엎질러진 물처럼 주워 담을 수 없는 지나간 자신의 충동을 다시 주워 담고 싶어졌다. 아예 모르던 그때로 돌아가 새롭게 다시 만나도 그에게 그럴까?
마음보다도 항상 몸이 먼저 반응하던 그와의 만남에 연희도 이 관계를 뭐라 명명해야 될까 잠시 고민했다. 친구도 아니고, 연인도 아닌 그런 사이. 그 어정쩡한 관계 어디메쯤에 서서, 자신은 진정 어느 편에 서고 싶은 것인지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는 연희 자신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