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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야블라썸 Apr 19. 2023

이젠, 진짜 안녕

#14. 토요일, 저녁 7시

하얀 목련꽃이 피어, 겨울과의 작별을 알렸다.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는 봄이 왔다. 새로운 학생들을 만나니 생활에도 변화가 생기는 듯 조금의 활기가 돌았다. 새로운 얼굴들을 익히느라 연희도, 선우도 서로를 익힐 시간은 없었지만, 점차 생활의 안정을 찾아갔다. 아직도 학교의 흐름을 따라가기 바쁜 초짜이지만, 작년과 달리 이제는 그다음의 순서가 보이니 바쁜 가운데서도 마음에 조금은 여유가 생기던 날들 중 3월의 어느 날 밤이었다.


쾅. 쾅. 쾅. 쾅!


밤 중에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연희는 잠에서 깼다. 새 학기라 피곤한 몸으로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연희는 무슨 일인가 싶어 창문을 열고 대문 쪽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기준이 서 있었다.


"여니야! 여니야~!"


이웃들이 뭐라 할까 봐 신경이 곤두섰다. 어떻게 해야 될까, 머리를 긁적이며 고민하는 사이, 기준은 두세 번 더 연희의 이름을 부르더니, 제 속을 게워내는 소리가 들렸다.


"우~욱! 욱~"


연희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창문 커튼 뒤에 숨어서 기준을 주시했다. 3월 첫 회식으로 과음을 한 듯했다.

어지간히 게워낸 후에, 다시금 문에 쿵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다 잠잠해졌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한 연희는 파자마 위에 두껍한 긴 카디건을 걸치고, 문 소리가 나지 않도록 고양이 발걸음으로 살금살금 밖으로 나가 보았다. 대문은 감히 열어볼 생각은 못한 채, 집 안쪽 대문 앞에서 대문 너머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기준이 대문에 기댄 채, 연신 연희의 이름만 부르고 있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음냐음냐...여니야...여니야..."


그러다, 금세 코를 드르렁 거리며 잠들기 시작했다.


'어휴, 선배는 또 왜 찾아와서 이러는 거야?'


3월이어도 노숙하기엔 차디찬 밤기운이 무척 신경 쓰였다. 조용히, 대문을 열고 나와 기준의 양복 주머니를 뒤져서 핸드폰을 찾아보았다. 그렇게 더듬는 동안에도 기준은 느끼지 못할 만큼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휴대폰을 찾자 연희는 조금 망설이다가 기준 손가락을 갖다 대어 지문을 인식시킨 후, 연락처 명단에서 그녀 와이프의 번호를 찾아보았다.

 

'울 마눌'이라고 적힌 연락처가 눈에 들어왔다.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그녀에게 어떻게 알려줘야 되나 막막했다. 술만 취하면, 고향을 찾아오듯 자신을 찾아오는 기준이 오늘처럼 불쌍해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이렇게도 못 잊을 사람이면, 좀 더 용기를 내어보지 그랬냐고 기준의 얼굴을 보며 속삭였다.


지금 이 순간에는 기준보다도 연희의 용기가 필요했다. 주소불명으로 잘못 배달된 값비싼 택배처럼, 탐나지만 가져서는 안 될, 내 것이 아닌 택배를 돌려보낼 용기. 주인을 찾아 기준의 전화기로 전화를 걸었다.


- 어, 자기야!


"아! 대신 전화했습니다. 남편분이 지금 만취하셔서, 저희 집 문 앞에서 잠이 드셨어요."


- 네에? 거기가 어딘데요?


"아, 지성대학교 근처인데, 정확한 주소는 문자로 보내드릴께요."


- 아, 그래요? 정말 너무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바로 가도록 할께요.


"네, 도착하시면, 이 전화로 연락 주세요."


연희의 심장이 떨려왔다. 드디어 말로만 들었던, 그녀와의 첫 대면이다. 알고 싶지 않던 그녀를 이렇게 만나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30분이 조금 지나서, 동그란 원 속에 삼각별이 빛나는 자동차 한 대가 그녀 집 앞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차문이 열리고, 문사이로 여자로서는 조금은 큼직막한 발이 땅에 닿으며, 남색 실크 잠옷 위에 급하게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나온 듯한 여자가 내렸다. 연희보다 한 뼘 정도 키가 큰 여자는 눈코입이 제법 시원스레 생긴 서구형 미인이었다. 성큼성큼 기준에게로 다가가더니 옆으로 긴 입을 삐죽빼죽거리며, 체격 좋은 기준을 차에 태우려고 애썼다.


그냥 바라만 보기는 그녀가 힘들어 보여서 연희도 조금은 기준을 부축하며 도왔다.


"대체, 여긴 왜 온 거야?"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그녀의 말에, 연희는 죄라도 지은 듯 흠칫거렸다. 그냥, 자기가 누군지 모르고 지나쳐주길 바랬다. 기준을 일으켜 세워 그의 한쪽 팔이 그녀의 어깨 위에 올려지자, 둘의 밸런스가 제법 잘 맞는 느낌이었다. 잠결의 기준은 이내 곧 다시 쓰러질 것 같았지만, 잠시 차까지 끌려가듯 대여섯 발 흐느적거리며 걷는 데도, 그녀의 키가 기준을 잘 받쳐주는 모양새였다.


'나라면, 저렇게 못 지탱해 줬겠지.'


연희는 둘의 조화로운 뒷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남아있던 기준에 대한 앙금을 또 한 번 게워냈다. 이젠 진짜 안녕... 다시는 찾아오지 말아요, 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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