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여행자는 또 제주 연동을 찾았다. 2시간 20분, 집 현관서 모살물까지 걸리는 시간. 김포에 산다면 나들이하듯 1시간 대에 드나들 수도 있겠다. 모살물 가면 객주리조림 시켜야지 마음먹지만 역시 서울 촌놈. 막상 가게에 들어서면 둘이 먹고도 남는 3만 원짜리 모듬회 한 상의 유혹을 뿌리칠 재간이 없다.
면세점 털러 왔지만 그래도 명색이 제주인데 바다는 봐야지. 연동에선 가장 빠르고 게으르게 바다를 보는 방법이 있다. 브로컬리 닮은 삼다공원 나무 틈에서 북으로 고개를 돌리면 된다. 도청에서 공항까지는 주욱 내리막길. 시야를 해칠 만한 건물도 없다. 도지사 나으리 오션뷰를 지키려 인허가를 내주지 않았나 의심이 든다.
도청서 공항까지는 초속 5cm로 걸어도 1시간. 도청 스카이라운지를 점령하고 싶지만 지사가 될 순 없으니 사지를 쓴다. 걸으면 걸을수록 바다가 선명해진다. 내리막길에 몸을 맡겨 힘들이지 않을 수 있고, 이 길을 걷는 미친 자는 드물기 때문에 마스크를 벗고 맘껏 풀내음과 바닷바람을 마셔도 자유다.
시속 50km로 달릴 땐 볼 수 없던 풍경도 눈에 든다. 지사님 납시는 길이라고 온갖 꽃들이 수놓고, 어린 시절 음악 교과서에서나 배우던 보리밭이 펼쳐지기도 한다. 베적삼 적시는 아낙네는 없지만 콩밭도 정겹게 늘어졌다. 신제주입구 교차로에는 부처님 오신날이라고 걸린 알록달록 연등 행렬이 수평선과 어우러진다.
바다가 점점 커지며 앵글을 덮친다. 신카이 마코토 '너의 이름은'의 한 컷 같기도 하다. 도쿄의 타키가 마츠하를 찾아 이토모리 호수로 달려가는 길처럼, 연동이라는 도시와 바다 사이에는 풀과 새들의 고요한 소란스러움이 가득 차있다. 꿈속의 풍경처럼 그냥 이유 없이, 아름답다. 비록 인기 없는 길이지만, 너를 기억해 줘야지.
마츠하처럼 정성스럽게, 짝퉁 다보탑에 예를 올린다. 부처님 오신 덕분에 모처럼 편히 쉬었다. 그러고 보면 성인이 된다는 건 누군가에게 휴식이 되어 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 길처럼 소소한 쉼만 줄 수 있어도, 그건 꽤 나쁘지 않은 사람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