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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철 Jun 07. 2024

언어와 세계-백척간두 진일보

'백척 간두 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라는 말이 있다. 한 걸을 더 디디면 낭떠러지로 떨어지지만, 그것에 발을 내밀라는 불가능한 주문이다. 


나는 종종 깨달음을 구하는 선사들의 수행과 끝없이 문자에 탐닉하는 학자들의 글쓰기가 그 정신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선사들이 구하는 깨달음은 문자의 세계를 넘어 불립문자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고, 학자들의 논증적이고 비판적인 글쓰기는 너머의 신비(mysticism)도 문자로 확인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현상적으로 본다면 전혀 별개의 세계처럼 보일 수 있다. 선사들의 깨달음은 철저히 체험의 문제이기 때문에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불립문자의 세계라는 생각이 너무나 당연시되고 있다. 부처가 염화시중의 미소를 보였을 때 오직 가섭 존자 만이 그 뜻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참으로 그럴까? 도대체 그 깨달음의 세계가 무엇인가? 그 세계는 언어 없이 알려질 수 있을까? 만약 그것이 알려질 수 없다면 그것은 유명한 고르기아스의 회의를 벗어날 수 없지 않을까?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존재한다고 해도, 전달할 수가 없다. 전달한다고 해도 알 수가 없다." 고르기아스는 깨달음의 세계는 없다고 주장할 수 있고, 설령 그런 세계가 있다 해도 불립문자라고 한다면 전달할 수가 없다고 부정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가섭처럼 전달받았다고 해도 그것이 무엇인지 제3자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사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세계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로 말하면 철저한 사적 경험이고 사적 세계일 뿐이다. 비트겐슈타인 말하는 '상자 속의 딱정벌레'의 논증이 그것이다. 이런 세계는 확인하고 검증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이 없기 때문에 참과 거짓, 옳고 그름을 판별할 수가 없다. 따라서 토굴 속에서 수행하던 선사가 깨달았다고 해도 농담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없고, 문자로 옮긴다 해도 일상 언어의 문법을 벗어난 것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세계에 대한 언어적 기술은 불가능한 것일까? 선사들은 불립문자요, 알음알이로는 알 수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끊임없이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이때의 언어와 깨달음의 세계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노자는 <도덕경>의 첫 장부터 ‘도와 언어’의 관계에 대해 규정한 바 있다.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이란 구절은 분명하게 도를 도라고 하는 순간 도가 아니고, 이름을 이름으로 규정하는 순간 이름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규정할 수 없는 도와 이름'에 대한 언어의 한계를 말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한 커플 더 뒤집고 들어가 보면 노자의 말은 모순처럼 말할 수 없는 도의 세계도 말할 수 없다는 문자를 통해서 드러나는 역설(parados)을 지시해 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문자는 대상을 직접적으로 기술하는 방식 외에도 기술할 수 없는 대상, 문자의 끝에 있는 대상과 역설과 신비를 통해 만나는 경우도 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이나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이다'라는 비트겐슈타인 말은 언어의 세계와 도(존재)의 세계가 비정상적이면서도 역설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글쓰기의 이런 역설적 전도는 선사들이 추구하는 깨달음과 도의 세계와 전혀 상관이 없다고만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양자 사이에서 긴밀한 관계를 보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글쓰기의 선이고, 선의 글쓰기'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6조 혜능 대사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육조단경>의 저자인 혜능대사가 광주의 법성사에서 《열반경》강의를 들을 때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는 걸 놓고 스님들이 논쟁을 벌였다. 한 무리의 스님들은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라 하고, 다른 무리의 스님들은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때 계도 받지 않은 혜능대사가 일갈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너희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혜능대사의 일갈에 만족하면 안 될 것이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 혹은 깨달음이 무엇일까라는 물음을 제기하면서 백척 간두로 한 발 더 내밀어야 한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인가, 깃발이 움직이는 것인가, 아니면 사부대중의 마음이 흔들리기 때문인가? 내가 보기에는 한 마디로 탁상공론하는 그 마음들이 문제라는 것이다. 문제가 아닌 것을 문제인 듯 공론하는 그 마음을 지적하면서 문제를 무화 하는 깨달음이다. 마치 칸트가 <순수이성비판> 서문에서 지적했듯, '숫 염소의 젖을 짜려고 하니까 그 밑에 체를 바친다'라는 형국이 그렇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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