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이름으로, 동백아가씨

by 하기

어머니의 이름으로, 동백아가씨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엄마는 소주 한잔을 마시면 항상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부르곤 했다. 그런 날은 대개 생활력이 없어서 돈을 못 버는 아버지와 싸운 날이거나 말썽 많은 친정식구들이 속을 썩인 날이 아니면 3남 1녀를 혼자서 먹여 살리느라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낸 날이었다는 것을 어른이 되어서야 나는 얼핏 짐작하였다.


“이번에 경주여행 가면서 어머니 산소에 들르려고 하는 데 당신 생각은 어때?”아내에게 말하니

“그래요. 재작년 어버이날 찾아뵙고 못 갔으니 이번에 안 가면 아들하고 손녀 보고 싶어서 어머니가 나를 원망하실 것 같아.”아내는 평소와는 다르게 선뜻 동의해주었다.


우리는 현충일과 주말 샌드위치 휴가를 이용하여 하루 연가를 내고 2박 3일의 가족여행을 가기로 되어 있었다. 숙박을 위하여 예약한 호텔에 체크인하기 전에 포항에 있는 선산에 들러 어머니의 산소를 보고 가려는 것이 나의 계획이었다.


아버지는 대구에 있는 모대학 법대를 졸업하고 지방은행에 취직하셨다. 가문 간의 중매로 결혼한 엄마는 중학교 졸업이 최종학력이셨다. 처음에 대졸자 신랑에게 시집간다고 자매들의 질투를 받을 정도이셨지만 아버지가 안정된 직장을 관두고 사업을 시작하면서 엄마의 인생도 꼬이기 시작하였다. 퇴직금으로 부동산 개발업을 하신 아버지는 경험 부족과 특유의 한량 성향으로 사업보다는 인간관계 등에 매진하느라 사업은 금방 적자노선을 걷게 되었다.


대구에서의 생활이 빚쟁이들의 빚 독촉으로 힘들어지자 아버지는 숙부가 상경하여 터 잡은 서울의 강북으로 가족을 이끌고 상경을 하셨다. 숙부 집 근처에 집을 얻고 법대 다닐 때 배운 법 지식을 이용하여 부동산 법인 사무실을 개업하셨지만 이 또한 오래가지 못해 폐업하게 된다. 엄마는 아버지의 기질상 사업은 안된다고 판단하시고 월급이 적어도 직장생활을 하라고 아버지에게 매일 밤 애원하셨다. 중장비 기사로 사우디에서 일하시는 이모부에게 아버지의 중동취업을 부탁하였지만 때마침 닥친 중동사태와 특별한 기술이 없던 아버지의 자격으로 인하여 이 또한 이루어지지 않았다. 본인의 능력 부족으로 가세가 기울자 아버지는 자존심이 많이 상하셨는지 엄마와 다투는 일이 많아지고 그런 날엔 집을 나가셔서 기원 등에서 바둑을 두시며 외박을 하시는 일이 잦아지셨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엄마는 4남매, 특히 아들 3형제에게 절대로 커서 사업을 하지 말고 안정된 직장을 구하라고 귀가 닳도록 말씀하셨다. 그 얘기가 지겹기도 했지만 3형제 모두 공무원과 공사 직원이 된 것을 보면 어머니의 잔소리가 주문처럼 우리 3형제의 가슴에 새겨진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세가 기울고 생활이 곤궁해지며 엄마는 점점 생활인이 되어갔다. 영일 상회라는 구멍가게를 열어서 직접 생계를 책임지기 시작하신 것이다. 돈을 못 벌어오고 가사도 도와주지 않던 그 당시 대부분 가부장들의 아내처럼 아버지의 무능력은 엄마를 점점 슈퍼우먼으로 만들어갔다. 구멍가게를 하며 4남매를 키우는 일은 신산하고 힘든 일이었기에 엄마는 때때로 소주 한잔을 마시며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부르는 것으로 자신의 한을 속으로 삭이신 것이었다.


“동백꽃잎에 새겨진 사연

말 못 할 그 사연을 가슴에 묻고

오늘도 기다리네 동백 아가씨

가신 님은 그 언제 그 어느 날에

외로운 동백꽃 찾아 오려나”


자가용을 타고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며 나는 이미자의 시디를 차 안에서 틀었다. 연서는 따분하다며 시디를 끄고 악동뮤지션의 신곡을 블루투스로 연결해 핸드폰으로 듣는다. 내가 다시 시디를 틀려고 하니


“엄마, 아빠 너무 고리타분한 음악만 들어.”연서는 투덜거렸다.

“살아계실 때 불효하더니 너무 늦게 효심이 발하셨나 보다 아빠가.”하는 아내의 말에 연서는 대꾸하지 않고 이어폰으로 악동뮤지션의 음악을 계속 듣는 듯했다.


구멍가게를 하며 4남매를 키우던 엄마에게 위기가 찾아온 건 옆 건물에 럭키슈퍼라는 최신식 체인화 연쇄점이 문을 열고나서였다. 단골들이 하나둘씩 안보이더니 결국 문을 열수록 손해가 나는 장사에 손을 턴 건 큰형이 대학입시를 위한 학력고사를 볼 즈음이었다.


엄마는 우리의 학비를 벌기 위하여 호텔 뷔페에서 주방일을 하였고 우리 4남매는 엄마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고자 모두 학비가 안 들거나 적게 드는 국립, 공립대학으로 진학했다.


4남매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기까지 엄마의 노동은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우리들은 우리들 나름대로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며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버티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철인 같았던 엄마의 건강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지 못했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았다고 말해야 할까.


4남매가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고, 그리고 결혼을 하기까지 엄마는 자신의 몸이 내부에서부터 하나하나씩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는지 더 이상 소주도 드시지 않고 동백아가씨도 부르지 않으셨다. 셋째 아들인 나는 엄마의 이런 고충은 아랑곳하지 않고 결혼도 하지 않고 독립하여 엄마의 속을 태웠다.


“결혼은 무슨... 엄마처럼 평생 고생만 하고 사는 게 결혼생활이라면 하고 싶지 않아.”하는 나의 말은 엄마의 가슴에 비수가 되었나 보다. 구멍가게를 하던 집이 재개발로 40평 아파트가 되어 입주하던 날 엄마는 폐암 4기 선고를 받았다. 자식들이 모두 장성하여 직장을 잡고, 평생 살고 싶던 아파트에 입주했지만 엄마의 행복은 시한부였던 것이다.


내가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사는 모습을 보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는 엄마의 말을 듣고 나는 사촌 여동생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 내가 결혼을 하고 연서를 낳고 첫돌이 되기까지 엄마는 그렇게 2년의 삶을 더 버티어 내었다.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 것 같다는 주치의의 연락에 4남매는 모두 대학병원 입원실에 모였다. 그날 밤 엄마는 4남매에게 밤새도록 작은 목소리로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절대로 직장을 관 둘 생각 말고 사업은 하지 말아라.”

“가족한테 친절하게 잘해라.”

“자식들을 위하여 항상 천지신명께 기도해라.”


새벽이 되어 더 이상 말은 못 하고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가는 숨을 이어가던 엄마의 눈에는 눈물인 지 땀인 지, 물기가 끊임없이 흘러내렸고 누나가 그것을 닦아주던 중 심폐 측정기의 맥박 표시가 갑자기 끊어졌다. 우리는 급히 간호사와 의사를 불렀지만 소용없었다.


“숨을 거두셨습니다.”하는 주치의의 말에 4남매는 그제야 “엄마, 사랑해.”하며 생전에 자주 하지 못했던 말을 계속 되뇌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내비게이션이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리자 눈앞에 고향 선산이 보였다. 입암서원 입구에 차를 주차하고 무릎까지 자란 잡풀을 헤치며 엄마의 산소로 가는 길은 묘사를 지내기 위하여 미리 벌초를 해 놨던 지난 가을보다는 훨씬 험난했다.


“걷기가 너무 힘들어.”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 사춘기에 접어든 연서는 끊임없이 불평하였지만 아내의 재촉에 말없이 따라온다.


엄마의 산소에 이르자 선산이라서 할아버지, 큰아버지, 큰어머니,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 순으로 산소가 있고 막내며느리인 엄마의 산소는 맨 가장자리에 위치해있다. 살아서도 대접을 못 받은 우리 엄마 돌아가시고 나서도 순서가 마지막이구나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나는 엄마가 좋아하던 소주와 약과, 과일 등을 제단에 올리고 절을 하였다. 아내는 오는 길에 꺾어온 들꽃으로 무덤 주변을 장식하고 연서와 함께 노래를 부른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나는 아내의 노래를 들으며 들꽃으로 장식된 엄마의 무덤을 바라보았다.


“엄마, 오랜만이네. 우리는 모두 엄마 덕분에 잘 먹고 잘 살고 있어. 앞으로도 건강하고 잘 살 수 있게 엄마가 많이 도와줘.”하는 나의 말에 “죽어서도 엄마한테 그러고 싶어. 이제는 편히 쉬게 해 드려야지.”하며 아내는 핀잔을 주지만 자기도


“이번에 연서 중간고사 잘 보게 해 주세요. 그리고 연서 아빠 하는 일 모두 잘 풀리게 해 주세요.”하며 두 손 모아 비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그래 엄마는 죽어서도 할 일이 많아 슈퍼우먼이니까.


이런 우리의 모습을 포항 죽장면의 명물 선바위와 함께 시골집의 늙은 소가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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