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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기 Nov 10. 2023

시디 신 인생의 맛

권여선의 '레몬'

시디 신 인생의 맛, 권여선의 '레몬'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권여선의 소설 레몬은 이 질문으로 시작한다. 왜소증인 엄마와 그 엄마가 낳은 배다른 여동생과 사는 한 소년, 그는 가족들 부양의 의무를 버리고 집을 떠난 두 아버지를 대신해 일찍부터 가장의 역할을 해야 하는 한 많은 운명의 소유자였다.


그런 운명을 거부하지 않고 잡초 같은 생명력으로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며 퇴근할 때 여동생이 좋아하는 꽈배기를 사 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있던 그에게 윤태림이라는 여자동급생을 배달 오토바이 뒤에 태운 일 때문에 살인자 누명을 쓰게 되는 인생의 결정적 위기가 찾아온다.


"나는 가끔 예전 식으로 그를 불러본다. 하안만우우우, 라고. 그러고 나면 과연 이 한 많은 삶에 의미 같은 것이 있나 하는 의문이 든다.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생이 아니라 구체적인 개인의 삶에 말이다. 그의 삶이 갈피갈피에도 의미 같은 것이 있었을까. 아니, 없었겠지. 없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삶에도 특별한 의미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한다. 그의 삶에도, 언니의 삶에도, 내 삶에도. 아무리 찾으려 해도, 지어내려 해도 없는 건 없는 거라고. 무턱대고 시작되었다 무턱대고 끝나는 게 삶이라고(소설 본문 12페이지)." 

 

또 하나의 한 많은 가족사, 아버지를 교통사고로 잃은 세 모녀. 하지만 아름다운 미모의 첫째 딸 해언과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은 모범생인 둘째 딸 다언은 엄마에게 삶의 희망을 유지시켜 준다. 자매의 우정도 남달라 셋은 서로를 사랑하며 가족애로 똘똘 뭉쳐 아버지의 부재라는 현실을 이겨나간다. 하지만 신정준이라는 남자 동급생의 차를 타고난 후 두부 손상으로 사망한 채 발견되는 해언. 이 사건으로 가족들은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게 되고 비극적 운명이라는 늪 속으로 대책 없이 빠져든다.


"아이들은 범인이 신정준이냐 한만우냐를 놓고 두 편으로 나뉘었는데, 언뜻 보기에는 한만우 쪽이 더 많은 것처럼 보였다. 그쪽 아이들 목소리가 더 크고 의견 표명이 거침없었기에 그렇게 느껴졌을 것이다. 신정준이 범인이라는 쪽 아이들은 왠지 태도가 조심스럽고 목소리도 작고 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인지 아니면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 편 주장에 더 끈질기고 집요하게 설득되는 느낌이었다(소설 본문 56페이지)." 

 

경찰 조사에서 일차적으로 해언과 동승했던 신정준이 의심받지만 부잣집 아들이었던 그는 변호사들의 철저한 변호 속에 사건 시간 알리바이가 증명되어 혐의를 벗고 학교를 중퇴하고 유학을 떠난다. 신정준의 여자 친구이던 윤태림을 오토바이에 태우고 신정준의 차 안 해언을 목격했던 한만우가 몇 가지 진술의 실수 때문에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며 살인누명을 뒤집어쓰지만 태림에 대한 연정 때문에 오해를 풀 수 있는 결정적 단서를 함구한 채 태림 쪽으로 수사가 확대되는 것을 막고 자신도 결국 결정적 증거의 부재로 풀려나게 된다. 


자식의 죽음과 가족을 죽인 범인을 확인할 수도 없어 원망하고 증오할 이를 찾을 수도 없던 가족들은 동네에서 이사를 하고 이 사건을 아는 사람들과 멀리 떨어지는 것으로 상처를 치유받고 싶어 하지만 끊임없이 해언의 사건을 인식하게 하는 주변의 현실은 가족을 잃은 고통을 심화시키기만 한다. 엄마는 아빠가 출생신고 시 딸의 이름을 혜은이에서 해언으로 잘못 신고한 부분에서 해언의 운명이 바뀌었다고 믿고 지금이라도 이를 정정하기 위해서 가정법원에 개명신고를 한다. 


"사망자는 소속이 없어 기재할 서류도 없는데 개명을 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도 반문했다. 엄마는 그건 상관없다고, 그냥 개명 허가만 내달라고 했다. 직원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망자의 개명은 불가합니다. 얼굴이 허옇게 질린 직원은 이렇게 말하고 엄마가 인지대로 낸 천 원을 네모난 접시에 얹어 돌려주었다. 천 원짜리 지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엄마는, 애가 죽었는데 그거 하나 못해주나, 그거 하나, 하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혼자만 사탕을 받지 못한 어린애처럼 울먹이며 지폐를 집어 들고 돌아섰다(소설 본문 86페이지)." 


엄마의 고통과 언니의 죽음을 감당할 수 없었던 동생 다언은 한만우 가족을 찾아가 진실을 요구하게 된다. 한만우의 우직함과 여동생의 다정함, 그리고 난쟁이 엄마의 소박함 속에서 한만우가 범인이 아니라는 확신을 하게 되는 다언. 신정준의 차 속에서 언니의 집안에서의 자세를 정확하게 묘사하는 태림의 말을 전달하는 만우의 말을 듣고 다언은 태림이 범인이라는 확신을 갖고 복수를 기획하게 된다. 

 

유학을 갔다 온 신정준과 결혼한 태림은 딸을 낳고 신정준은 딸아이에게 흠뻑 빠져 딸바보 아빠가 된다. 행복해 보이는 가족. 하지만 알 수 없는 긴장과 지속되는 우울이 가족을 지배하고 베이비시터가 마트에서 딸아이를 잃고 돌아오며 가족은 해체의 단계를 밟게 된다. 딸아이 유괴사건을 오래된 해언의 살인 사건과 연계시키는 경찰의 태도에 수사 중지를 요구하는 신정준의 부모. 태림은 더 이상의 출산을 거부하는 것으로 항의를 하지만 남편의 몰락과 가족의 파괴를 막을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이렇게 해언의 죽음과 관련된 세 가족 모두 살아있어도 죽어버린 가족이 되면서 작가는 죽음의 의미와 그와 상반되는 삶의 아름다움이라는 화두를 독자에게 던지고 있다. 


"죽음은 우리를 잡동사니 허접쓰레기로 만들어요. 순식간에 나머지 존재로 만들어버려요.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퍼뜩 해언을 떠올렸다. 순식간에 우리 모두를 나머지 존재로 만들어버렸던 해언의 아름다움, 너무 압도적이어서 과연 그런 아름다움이 실제로 존재했던 것인지 의심스러워지기까지 하는 그런 아름다움을 생각하자 마음이 일렁였다(소설 본문 180페이지)."  


시디 신 맛으로 직접적으로 맛보고 싶지는 않은 과일 레몬. 하지만 다른 음식의 향을 돋우어 맛을 배가시키는 향료로서의 기능 때문에 많은 음식에 사용되는 식자재이기도 하다. 이처럼 음식의 맛에 없어서는 안 되는 레몬의 외향은 아름다움에 있어서도 어떤 과일에도 뒤지지 않는다. 

 

모두를 나머지로 만들 만큼 절대적이고 우월했던 해언의 아름다움은 그녀를 빛나게도 했지만 시기와 질투의 대상으로 만들어 그녀의 운명을 나락으로 빠뜨린다. 그토록 아름다웠던 그녀는 가족의 프라이드였지만 그 상실은 회복 불가능한 상처로 가족들의 마음을 할퀴어 놓는다.


해언에게 사랑하는 남자친구를 뺏길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은 태림이라는 여자를 범죄자로 만들었고 태림을 남몰래 연모하던 만우의 짝사랑은 자기 자신을 범죄혐의자로 만들어 한 많은 인생의 굴곡을 지나게 한다. 그리고 언니의 죽음에 대한 다언의 복수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복수의 윤회를 떠오르게 한다.


권여선 소설가는 서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재원으로 1996년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로 제2회 상상문학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한다. 하지만 그 후 10년간 인상적인 작품을 발표하지 못하며 지지부진한 문단 생활을 이어 나간다. 이런 그녀의 아픔이 자양분이 되어 소설가로서 더욱 성숙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최근에는 장편소설 ‘레가토’가 회고문학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고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산문집 ‘오늘 뭐 먹지’로 술과 안주, 음식에 대한 안목을 인정받고 있다. 모두가 소설가의 길을 포기하지 않은 지속적인 창작에 대한 노력 때문일 것이다.


레몬같이 시디 신 인생의 맛을 알아버린 소설가가 다음에는 어떤 소설로 또 다른 인생의 맛을 선물할지 독자로서 그녀의 다음 장편소설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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