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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서재 강현욱 Nov 15. 2024

고라니. _ 1부.

단편소설들.


'운명은 선택들 집합이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선택하지 않는다. 그게 훨씬 쉬운 일이니까. 지만 그것 또한 선택이다.'   '김진수'의 노트 중.


 당신은 일 년 전, 이혼을 했다. 아무런 일도 아니라는 살던 집에서 나온 건 당신이었다. 당신은 산 아래 빌라 단지로 이사오게 된다. 거처를 옮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은 덥게 느껴지던 늦 가을의 어느날, 당신은 도로 옆에 부러져 있는 고라니 사체보게 다. 아마도 밤 사이 어느 차량과 부딪힌 후 처절하게 배를 밀어 전진하고, 몸을 비틀어 길 가장자리까지 다다른 듯했다. 죽은 고라니를 위한 묵념이라 하기에는 조금 들떠 보이는 할아버지와 사내들이 고라니를 에워싸고 있었다. 지나가던 당신은 수신자가 정해지지 않은 말을 무심코 건넨다.


'고라니들은 사람을 만나면 왜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지 모르겠어요.'

'얘네들이 쓸개가 없어서 그런 거요. 험한 거 보지 말고 가던 길이나 가소.'


 퉁명함이 잔뜩 묻은 노인의 말에 당신은 뾰족한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억눌러야 다. 평소라면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었을테지만, 바늘로 긁는 듯한 기분이 다. 사실 이혼으로 인한 후유증이라도 되는 듯, 당신에게 불면증과 우울증이 찾아왔다. 작은 소리에도 예민해지고,  의미없는 말에도 심장에는 얼룩이 남는다. 쓸개가 없다는 그의 말에, 당신은 터무니 없다는 듯 검색 창을 열어 고라니 쓸개를 입력한다. 별다른 지식이나 정보가 나오지 않는다. '정말인가. 정말 쓸개가 없는 건가.' 당신은 고개를 갸웃하며 목을 돌려 그들을 바라본다. 동네 사내들과 노인은 어디선가 헤진 마대 자루를 구해와 죽은 고라니를 마대 자루 안으로 공들여서 욱여넣는다. 그마저도 나뭇가지 같은 고라니의 한 쪽 다리가 마대 자루에서 덜렁 흘러내린다. 네 사람은 핏물이 번지는 마대 자루를 1톤 트럭에 힘겹게 옮겨싣는다. 그들의 표정에는 탐욕을 닮은 붉은 빛 화색이 가득했기에 당신은 그들을 향해 경멸감이 일어난다. 경멸감과는 무관하게 무언가를 성취한 듯한 1톤 트럭은 그 자리를 유유히 떠나가고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다. 당신은 고라니의 비루한 관짝에 처연한 마음이 일어서기도 지만, 이내 발걸음을 재촉한다. 고라니에게서 당신의 해묵은 상처를 보았지만, 당신은 의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벌써 일 년이나 지난 일임에도, 당신은 여전히 핏물이 흥건한 그 고라니를 기억한다.

 당신은 많은 걸 잃었는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해야 할 일을 하며 살아간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면도를 하고 타이를 고르며 출근 준비를 서두른다. 물론 아침 식사도 거르지 않고 챙겨 먹는 편이다. 주말에는 드라마를 챙겨서 TV를 시청하거나, 때로는 혼자서 목적지 없는 여행을 하기도 하며 갑작스레 흘러넘치는 시간을 나름대로 잘 보내려 애쓴다. 그건 혼자일 때 느껴지는 외로움보다 혼자가 아닐 때 굴러내려오던 소외감과 자괴감의 무게를 잘 알기 때문이다. 외로움이 밀려 때면 아내와 이 년간의 각방 생활 끝에 이혼을 결심한 일을 습관처럼 떠올린다. 그날도 당신은 고라니를 만났었다.


 당신은 유난히도 짙은 산 안개를 지나 퇴근 중이었다. 농밀한 안개로 인해 희뿌옇게 산란하는 도시의 빛을 받아 산 허리는 평소보다 더욱 꿈틀거리며 파르스름하게 타올랐다. 당신이 4차선 대로에서 커브를 틀어 소로로 진입할 무렵, 고라니 한 마리가 도로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있다. 당신은 단말마의 비명처럼 짧게 소리를 지르며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고서 차창 너머의 그를 바라본다. 고라니의 반질반질한 눈동자에 부딪힌 라이트는 기묘한 인광이 되어 당신을 향해 되돌아 온다. 잠깐 동안이지만 현실을 지워버리는 듯하기도 하고, 현실에 눈을 뜨게도 하는 듯한 선명한 빛. 어떻게 보면 당신을 향해 질주할 것도 같고, 또 어떻게 보면 모호체념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그 눈빛. 당신은 홀린 것처럼 그 빛을 잠시동안 바라본다.


'비켜...  비키라구... 너... 그러다가 죽어.'


 고양이나 들개들을 몇  이나 맞딱뜨렸지만, 당신은 처음 겪는 일인 것처럼 여전히 가슴을 쓸어내린다. 길게 숨을 내쉬고, 짜증을 조금 섞어 라이트를 위 아래로 몇 번 깜빡여도 보지만, 그는 갈 곳이 없다는 것처럼 당신을 가만히 응시할 뿐이다. 생각해 보면, 그건 고라니의 잘못은 아니다. 그들이 살던 곳에 도시가 생겨났고 대낮처럼 불을 밝힌 건 인간이니까. 어둠이 눈을 뜰수록 다가가서 만져보고만 싶은 매혹적인 불빛들이 곳곳에서 치솟으니까. 경계는 단번에 뛰어넘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좁은 2차선 도로일 뿐이니까. 아직 어려 보이는 고라니는 시간이 멈춘 듯했으나, 다시 푸르스름한 산을 향해 뛰어 올라간다. 왠지모를 안도감이 섞인 허전함 때문에 당신은 고라니의 윤곽을 추적한다. '고라니, 멧돼지 주의' 한쪽 귀퉁이가 찢겨진 현수막이 칼바람을 맞으며 둔탁하게 울부짖는다. 고라니는 왜 사람을 보면 얼어 붙은 듯 서있기만 한 걸까. 당신은 어찌보면 쓸모도 없는 생각에 잠기다가 자신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하며 자조적인 웃음을 흘린다. 당신은 엑셀을 밟은 다리에 다시 힘을 준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불이 켜진 당신의 집을 물끄러미 올려다 보며 길게 숨을 내어쉰다. 아파트 맨 윗층에 걸린 품에 안길 듯한 달빛에 당신은 잠시 고요하게 서있는다. 그리고 방금까지 걸어온 길을 당신은 물끄러미 뒤돌아보며, 지나온 길을 어둠이 지운 것만 같다고 생각한다. 이내 입구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누른다. 뚜. 뚜. 뚜. 숫자를 누를 때마다 밝혀지는 연푸른빛과 함께 오늘 마주친 고라니의 형형한 눈빛이 당신의 눈꺼풀 안에서 멸한다. 당신은 마치 최면에 걸린 듯, 푸르스름한 빛의 움직임을 따라 심장의 박동이 빨라진다. 집에 들어설 때마다 느끼는 서늘함이 오늘은 유난히도 깨진 유리조각처럼 다가온다.


'나왔어.'

'늦었네. 신발 벗기 전에 쓰레기 좀 버리고 와. 현관 입구에 내어놓았어.'

 '...'


 당신의 아내와 열네 살 딸 아이는 나란히 쇼파에 앉아 드라마를 시청 중이다. TV 소음과 섞인 아내의 목소리는 자동재생되는 어떤 기계음처럼 당신에게 건조하게 들려온다. 오늘 당신과 아내가 나눈 첫 대화다. 당신은 신발을 벗다가 다시 신발 안으로 발을 집어넣는다. 정장 차림으로 한 손에는 재활용 쓰레기를, 다른 한 손에는 일반쓰레기를 들고서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 나간다. 꾹꾹 눌러담은 쓰레기의 무게가 육중한 닻이 되어 바닥을 향해 당신을 끌고 내려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아직 채 열기가 가시지 않은 국을 떠서 밥을 말아 먹는다. TV에서 흘러나오는 의미없는 소리들. 아내와 딸의 동시다발적인 웃음과 감탄사만이 거실을 채운다. 수많은 소리들 안에서 당신의 존재는 흐릿해진다. 드라마가 끝나자 딸 아이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고, 학원에서 내어준 숙제를 시작한다. 아내는 침실로 들어가고, 유튜브를 시청한다. 당신은 서재로 들어가 톨스토이 안나 카레리나를 펼친 후, 어제 다 읽지 못한 부분을 읽어내려간다. 익숙한 듯 각자의 방으로 일제히 흩어지고, 당신의 하루 중 가장 평온한 시간에 전원이 들어온다. 당신은 회사에서도, 일터에서도, 그다지 존중받지 못하기에 이 시간만은 지켜내고자 애를 다. 잠시나마 당신이 특별해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곤 하니까. 하지만 그마저도 두꺼비 집이 내려간 듯 그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서재의 문이 무례하게 열리고 어떤 애정도 느껴지지 않는 아내의 말이 얼음송곳이 되어 당신의 살갗에 생채기를 낸다.


'아래에서부터 치약 짜 쓰라고 몇 번을 말해? 왜 말을 하면 들어주질 않아... 그리고 나, 내일 출장인거 알지?'

'지난 주에도 갔었잖아. 무슨 출장이 그렇게 많아...'

'회사 일이 그런 걸 나보고 어떡하라구. 이틀 정도 걸려.'


  순간 부러진 면도날 같은 침묵이 일어나고, 침묵을 견디지 못한 문은 다시 단호하게 닫힌다. 분노와 환멸감, 그리고 의구심이 혼재된 감정이 아내가 닫은 견고한 문틈을 따라 비집고 새어 나간다. 당신은 서재에 이불을 펴고, 형광등을 끄고서 자리에 눕는다. 아내와 잠을 따로 자기 시작한 게 어느덧 이 년 정도 흘렀다. 처음 각방을 시작했던 그 어느날을 당신은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사소한 당신의 코골이로 시작되었던 것으로 어렴풋하게 여겨질 뿐이다. 당신의 코골이로 인해 수면부족에 시달리던 아내를 생각해 한치의 의심도 없이 결정한 일이다. 그리고 당신은 꾸준히 치료를 받았고 코골이는 점차 사라졌지만, 아내와 당신 사이에 자라난 벽은 그만큼 반비례해서 두터워졌다. 코골이와는 상관없이 아내와 당신은 언젠가부터 분리된 각자의 생활에 편안함과 만족감을 느낀다. 얼마동안은 가끔 동침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조차 아내도, 당신도 의무감이 섞인 불편함으로 다가온지 오래다. 당신은 서재에 누워 이불을 당겨 는다. 고라니의 영롱한 눈빛이 뇌관이 되어 명치 깊숙한 곳에서 불꽃을 일으키는 것만 같다. '가만히 있으면 그러다 죽어.' 당신은 벽을 향해 둥글게 몸을 말고서 눈을 깜빡이며, 잠을 이루지 못한다. 오늘은 이상하게도 이불 안에서 참을 수 없는 한기가 밀려오고 있음을 느낀다. 그저 달이 밝았을 뿐이고, 쓰레기를 버렸을 뿐이고, 아내의 역정을 들었을 뿐이고, 고라니와 눈을 마주쳤을 뿐이고... 그래서 그런 거라고 여느 때처럼 스스로를 이해시킨다. 하지만 끝내 이해되못해 넘치는 차가움은 당신을 더 깊은 심연으로 끌어내린다. 당신은 스스로에게 행복한가를 묻는다. 경계를 넘고 싶은가를 묻는다. 더 나은 삶이 있는가를 묻는다. 아랫 입술에 악물린 자국이 남는다. 무엇하나 확신하지 못하지만, 바싹 마른 입으로 당신은 결심한다. 경계를 넘어야만 하겠다. 당신은 단호하게 문을 열어젖히고 경계를 향해 나간다. 그런 당신은 솔직히 무섭다.

 그렇게 당신은 몇 번의 분란을 지나 결국 얼쩡거리던 경계를 넘었고, 그것에 대한 어떤 변호를 하고 싶거나, 증명하고 싶은  한번도 없었다. 그저 당신은 다른 사람들처럼 지금까지 살아온  뿐이다. 어렴풋한 외로움과 조금의 건조함과 약간의 두려움을 가까이에 두고서.


 당신은 여느 때처럼 가다서다를 반복하다 겨우 출근시간에 맞춰 사무실에 들어선다. 당신은 본능처럼 옆 팀에서 근무 중인 박혜인씨부터 살핀다. 그녀를 볼 때면 하얀 백합이 떠오르곤 했고, 아무리 봐도 질리지가 않는다. 그녀가 당신이 속한 부서로 전보되던 첫 날을 기억한다. 단아하게 말아올린 숱 많은 까만 머리칼, 하얀 피부에 얹힌 옅은 쌍꺼풀, 단정한 블라우스와 주름잡힌 치마. 그날 이후 당신에게 나타난 본능은 세상과 선명하게 구분지어지는 그녀의 경계를 기웃거리게 한다. 그녀는 항상 희미한 슬픔이 묻은 표정이었지만 언제나 다정하게 웃었고, 가느다란 입술에서는 부드러운 언어들이 흘러나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슬픔이 배어있는 그녀의 눈빛과 만날 때면 당신은 어쩔줄 몰라 눈동자를 여기저기로 옮긴다.

그녀는 당신이 아파보이기라도 하면 비타민이나 두통약을 챙겨주기도 하고, 당신이 마시다 남긴 커피를 자신의 잔에 아무렇지 않게 따르기도 한다. 그럴때면 선의와 유혹 사이에서 밀려오는 어떤 생경한 마음에 당신은 조금 두려워 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두려움을 당신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주 오래 전에 가졌던 풍화되고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던 설렘이라는 낯선 감정이었으니까.


'김주임. 이리로 와봐. 계획서가 이게 뭐야... 작년이랑 토시 하나 안 틀리고 똑 같잖아. 생각 좀 하며 일해.'

'죄송합니다.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열심히 하지 말고, 좀 잘해라. 승진 안 할거야?'


 오늘 하루동안 사람들은 탕비실에서, 흡연실에서, 또는 등나무 시렁 아래 벤치에 앉아 당신의 모욕적인 순간을, 순간이 아닌 듯 길게 이야기할 것이다. 오랜 경험상 그런 느낌들은 모호하지만 실체를 가진 것이었고,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당신의 영혼을 짓누르곤 다. 선배와 후배 사이에서 눈치를 살피는 일이 일상이 되고, 동기들의 자랑섞인 푸념에 어색한 위로를 전해야만 하는 당신이 가끔 비루하게 느껴지곤 다. 그들은 모두 삶의 목표가 있는 듯했지만, 당신은 아주 오랫동안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당신도 사실  때는 꿈이 있었다. 단지 스스로가 잊어버렸을 뿐이다. 먹고 사는 일이 바쁘다는 말로 위장하는게 훨씬 쉽다는 걸 잘 아니까.

 당신은 사람들에게 오래 읽히고, 삶을 바라보게 하는 소설을 쓰는 작가가 되길 희망했기에 문예창작학과를 입학하고 졸업했다. 그리고 작은 출판사에 취업해 작가들을 인터뷰하고, 글을 교정하며 조금씩 자신의 소설을 쓰기도 했다. 비록 수입았지만, 스스로의 삶에 당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출판사 사정이 어려워지고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당신은 결국 현실을 향해 무게추를 기울여야만 했다. 그리고 그건 당신의 잘못이라 할 순 없다. 안정적인 보수가 지급되는 공무원이 되었고,  때는 자신보다 더욱 사랑했던 아내를 만났으며,  아이의 신비로운 탄생도 경험했으니까. 꿈, 영원, 사랑. 이런 말들에 흥분하지 않는, 그저 40대의 중년이 된 것뿐이니까.

 과장의  질책을 받고서 주눅든 당신은 자리로 돌아와 모니터를 켜고, 계획서를 수정한다. 계획서를 이리저리 살펴볼 무렵, 당신의 어깨에 부드러운 손을 얹는 듯 박혜인씨의 메세지가 날아든다.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과장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말을 막하시잖아요. 점심 같이 드실래요? 제가 살게요.'


 그녀가 가끔 보내오는 다정한 말은 기죽은 당신에게 놀랄만한 용기를 만들어낸다. 마치 캄캄한 동굴 안에서 얼핏 보이는 따듯한 빛. 그곳에 무엇이 있든 이끌리듯 따라가 만져보고만 싶은 빛. 당신은 그 빛을 향해 조심스레 경계에 다가가본다.


'저... 괜찮으시면 마치고 맥주 한잔 하실 수 있을까요? 제가 살게요.'

'네. 그래요.'


 박혜인씨의 문장을 가만히 바라보다 무엇에 씌인 것처럼 그녀를 향해 조금 더 발을 내밀었고, 그녀는 거리낌 없이 허락한다. 덕분에 당신은 아침에 과장과 있었던 일을 조금 고맙게도 여긴다. '괜찮아?' 복도에서 마주친 동료들의 뜻 모를 질문에 당신은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다고 대답한다. 당신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그럴리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한번 힘 내라는 말을 하고서 그들은 종종걸음으로 사라진다. 당신은 수시로 시계를 살피고 창밖을 바라보며 과장이 말한 계획서를 조금은 즐겁게 수정한다. 창백한 햇살이 마지막으로 창가를 지나갈 때, 까만 밤이 이토록이나 기다려질 수 있다는 사실에 당신은 조금 어리둥절해 하기도 한다. 퇴근 전 화장실 거울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초조한 마음으로 건물을 빠져나온다. 구청 앞 횡단보도에서 그녀를 만나 과장에 대한 농담 섞인 험담을 하며 인근 맥주집으로 향한다. 그녀와 나름 친하다고 여겨왔지만 그녀와 단 둘이 밖에서 만나는 일은 처음이었기에 당신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친다. 구리빛 생맥주 몇 잔이 다녀가고, 취기어린 목소리로 당신은 말을 꺼낸다.


'혜인씨는 예뻐요. 웃는 모습도, 일하는 모습도... 그런데 혜인씨에게는 이상하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슬픔 같은 게 느껴져요...'

'그런가요... 엄마가 치매를 앓고 있어서... 숨기지만 저도 모르게 조금씩 드러나나 봐요.'


 박혜인씨는 결혼하지 않은 40대 초반의 여성이다. 단아한 외모와 다정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5년 전, 그녀 또한 정혼자가 있었지만, 그 무렵 그녀의 어머니는 부정맥으로 쓰러지고, 후유증처럼 치매를 앓게 다. 그녀의 어머니는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기도 하고,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순간도 많아진다. 그녀 자신의 삶으로 누군가를 초대하는 일이 두려웠기에 결국 노모와 둘이서 살아간다. 어쩔 수 없던 선택의 순간을 겪어야만 했던 그녀에게 당신은 연민의 감정이 일어난다. 그녀에 대해 조금 더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스스로가 별해진 것만 같은 기분이 되고, 특별해진 당신은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 준다. 당신과 그녀는 택시 뒷좌석에 나란히 앉는다. 택시 안의 조금 더운 공기와 고단함으로 그녀는 해바라기처럼 목이 몇 번 기울어진다. 당신은 당신의 어깨를 그녀에게 조금 더 가까이 가져간다. 그녀의 잔꽃무늬 플레어치마의 감촉이 당신의 손끝에 닿는다. 이내 당신의 어깨 위로 그녀의 오드 콜로뉴 향이 깃털 같은 무게로 내려 앉는다.


덧. 어떤 선택들이 조금씩 운명을 만들어 가던 모습들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조금은 보이는 듯합니다. 잘한 것도, 잘못한 것도 있었던. 그럼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보다는 조금은 더 의지대로 선택하는 삶을 살고자 합니다. 갑작스러운 인사로 정신이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글 쓰는 일은 놓을 수가 없네요. 날이 차갑습니다. 건강 잘 챙기십시오.

작가님들, 그리고 독자님들 항상 강건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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