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서재의 창에는 성에꽃이 피어난다. 꽃이라기 보다는 어떤 잎사귀에 가까운 모양인데, 차가운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내가 낙엽을 보며 덧없는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어느새 계절은 성에꽃을 피워낸 것이다. 차가운 이 꽃은 추울수록 선연하게 피어난다. 입술을 오므리고 성에꽃을 호호 불면, 그들은 금세 시들어버린다. 겨울의 차가움을 지우려고 애쓰지만, 성에꽃은 피어나고 다시 피어난다. 안타깝게도 내가 게으름을 피우는 동안, 계절은 단지 해야할 일을 하며 변해왔던 것이다. 자연은 어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때가 되면 모습을 바꾸고, 삶의 방식을 변화시킨다. 그건 누군가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니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진행되는 것도 아니다. 숭고한 사명에 가까운 이 계절의 단호한 결의가 일어난 것이라는 생각. 나는 그런 자연의 의지를 사랑하며, 변하지 않는 계절을 상상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나는 그들과 함께 얼마나 변해왔던 것일까. 자신이 없는 고개는 떨구어진다. 쥐고 있던 연필심이 툭하고 부러지며, 그 낙차의 서늘함이 목덜미를 파고든다.
인쇄되기 직전에 두려운 문장들을 급하게 지워버리듯, 결점들을 외면하고 덮어두기에 급급하며 지금껏 나는 살아온 건 아니었을까.
북쪽 지방에는 어느새 첫눈이 내렸다고 한다. 부정할 수 없는 겨울인 것이다. 무심한 이 계절은 정원가를 방치하다시피하고, 정원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관심조차 갖지 않는다. 딱딱하게 굳은 흙은 삽날이 들어갈 틈새가 없고, 얼음같은 공기는 장화 속을 헤집어 놓는다. 날카로운 바람은 가지런히 덮어둔 짚이불을 끊임없이 파헤치고, 정원가를 자포자기하게 한다. 잔디도, 잡초도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은 정원은 완전한 적막이다. 간혹 멀리서 들려오는 백구의 울음소리만이 단단한 시골의 적막을 간간이 깨트린다. 정원가는 정원을 천천히 둘러보며 자신과의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 시간을 강요당한다. 겨울. 얕은 잠결에 아득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를 닮은 계절. 어떤 침묵이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아서 자꾸 돌아보게 되는 계절. 고요한 언어에 식은 땀을 흘리며, 더듬더듬 대답해야만 하는 계절. 고요함은 깊고, 깊은 것은 숨막힐 듯 불편하지만,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삶, 죽음, 영혼, 인간의 본질, 나는 어떤 인간인가. 하는, 이런 류의 질문들에 대한 대답에 잠기다보면, 스스로 변해야만 한다는 다짐 같은 것이 떠밀려오곤 한다. 하지만 나의 어쭙지않은 의지는 행동을 견인하지 못하는데, 그건 사실 도무지 변하지 않는게 인간이기 때문이다. 속된 표현으로 죽을 때가 되면, 사람이 변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어쩌면 어둠이 깊어질수록 내면으로 침잠할 수 있는 시간의 질감은 두터워지는 게 아닐까.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진다는 동지가 다가온다. 그너머의 긴긴밤은 집요할 것이고, 짧은 낮은 적당히 물러날 것이다. 겨울의 나무들은 어떤 결연한 의지를 품고서 세상을 응시하는 것만 같은데, 인생의 중반에서 나도 변하기 위해 나를 응시해야만 한다.
박제된 허물은 더이상 나를 지켜주지 못하니까. 굳어버린 생각은 조금도 나를 나아가게 하지 않으니까.
한때, 나는 끝날 것같지 않은 여름이었다. 그건 착각이었고,내 삶에 대한 방관자에 지나지 않았다. 이젠, 어느새 겨울에 서서 갈 곳 없는 아이처럼 어물쩍거린다. 엉망으로 술에 취하면, 그다음 날 자기 경멸에 빠져 절망하고, 실패가 두려워 조금의 용기조차도 내어보지 못하면서, 쓸데 없이 목뼈만 빳빳하게 들고 다니는 여전히 가련한 인간일 뿐이다. 치졸한 자기 연민이 가득한 눈빛으로 지나가는 계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봄은 연둣빛으로, 여름은 녹빛으로, 가을은 감빛으로, 겨울은 은빛으로 물들어 가는 세계의 무자비한 섭리가 눈에 거슬린다. 하지만 자연은 모든 시간에서 아름답다. 심지어 모든 것이 사라진 듯한 이 계절조차도 사무친다. 태어나고, 타오르고, 익어가고, 내려놓아야 할 결정적 시점에 스스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무얼했던가. 지나간 시간에 대한 반복적인 후회와 증오, 그리고 체념과 자책을 생산했을 뿐이다. 이런 쓸모도 없고 소모적인 감정들을 계절은 기다려주지 않는데, 조금만 더 있어달라며 가당치 않은 오기를 부리다 생기는 시간과의 마찰이자, 비루한 투쟁의 결과라는 생각. 그리고 나는 번번이 이 싸움에서 패배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시시각각 늙어가는 중이다. 변하지 못하면 결국 죽음 앞에서도 패배할 것이 자명하다. 무언가의 노예처럼, 극복하지도, 탈출하지도 못할 것만 같은 두려움이 발밑에서부터 밀려온다. 뚜렷한 주관은 낡은 고지식함으로, 주의 깊은 세밀함은 닿기조차 싫은 까칠함으로, 총명한 호기심은 피곤한 집착으로, 낡음에 따른 물리적 변화는 결국 박제된 채, 무너질 창고의 한 구석에 처박힌다. 인간에게 필요한 건 항상성이 아닌, 화학적 변화를 동반한 역동성이지만, 안타깝게도 사람은 쉽게 변하지 못한다. 사십 대의 중반에 서서 물끄러미 뒤를 돌아본다. 나의 남아 있는 나날은, 살아온 나날만큼의 시간을 나에게 허락해 줄까. 선뜻 답을 할 수가 없다. 또다시 고개는 떨어진다.
변해야만 하는데, 어리석게도 영원히 살 것처럼, 나는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꼴사나운 몰골로 그 언덕을 오르던 어느날, 나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탈피를 경험한 듯하다. 그 시절에는 분명 알지 못했으나,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었던 건, 그 언덕에 기어오르던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해보지도 않은 정원일을 하면서, 지루하기만 한 책을 두서없이 읽으면서, 외경스러워했던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 어느날부터, 나는 보일 듯 말 듯, 조금씩 변해왔던 것이다. 나의 변화라는 건, 그리 거창할 건 없으나, 운명을 바꾸기에는 어쩌면 충분했을 것이고, 자못 만족스럽기도하다. 차갑지만, 뜨거운 고독이 편안하고, 정원가 특유의 책임감이나 인내심과 같은 정적인 근육을 벼리게 된 듯하다. 더이상 관계와 체면, 재미에 휘둘리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고독한 노동을 하며 묵묵히 기다려야 하는 일이 정원가가 해야하는 대부분의 일이며 습성이니까. 정원일을 해본 사람이라면, 이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이다. 지나간 현재와 지금의 현재,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정원일과 글쓰기, 그리고 독서의 교집합이라는 생각. 식물을 원하는 만큼 가꾸어 보는 일은 분명 가치가 있는 일이지만, 사실 그만큼 단념도 쉽게 이루어진다. 몸을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고, 조금도 하루를 허투루 보내서는 안 되는 일이니까. 그렇다고 눈 앞에 바로 결실을 가져다 주지 않는 게 정원일의 쌀쌀함이기에 결과에 급급한 사람들에게는 답답한 일일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되고도 고독한 노동을 하는 정원가와 글쟁이의 모습을 볼 때면,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한다는 자만 섞인 오해를 하곤한다. 하지만 정원가는 다가오는 봄을 위해 가을과 겨울을 가꾸는 것뿐이고, 흔들리지 않는 평온함을 동반한 침묵을 동력으로 삼을 뿐이다. 그래서 재미와 타인의 시선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내면을 가꾸고 미래를 경작하기에도 정원가는 분주하니까.
정원가는 반드시 스스로 부딪치고 인내하면서 깨달아야 한다. 깨닫고 행동하고 변하지 않으면, 정원은 정원가에게 더이상 다정한 매발톱과 샤스타데이지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저 성에꽃만이 무성할 뿐이다. 그리고 그건, 운명이다.
인간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거라고 사람들은 말하곤 한다. 나는 그걸 믿지만, 누군가에게 믿게 할 수 있을까. '니체'는 왜 하필 영원회귀라는 말로 사람들의 영혼을 당혹스럽게 한 걸까. 지금 이 순간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이 끔찍한 발상은 종교적이든, 인간 내면의 어둠이든, 견고하게 뿌리내린 그것들을 뾰족한 바늘로 할퀴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이 겨울이 지속되어서 정원가들이 모두 성에꽃만 닦으며, 하늘을 원망하는 일로 매일을 살아가야 한다고 상상하면, '니체'가 야속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사실 지금 딛고 선 현재가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말해준다. 비단, 사십대 뿐만 아니라, 모든 삶에 필요한 차갑지만 강렬한 '니체'의 채찍이라는 생각. 그의 말처럼 운명이 반복된다면, 지옥 같은 지금의 현실이 반복되지 않도록, 지옥을 벗어나기 위해 현재를 가꾸어야 하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선택을 해야만 하지 않을까. 잘 가꾸어진 현재가 반복될 때, 비로소 두려움없이 자신의 삶에 안도할 수 있을 테니까. 매일이 쌓여 삶이 되고, 삶이 모여 운명이 된다. 그리고 매일을 쌓아가는 것은, 내가 알든 모르든, 나의 내재된 기질에 따른 선택의 소산이다. 기질이라는 건, 내 안의 욕망과 본능, 암묵적인 지식과 경험들이 융합된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성격이다. 우연적인 사건들을 인연으로 포장해 왔으나, 사실 돌이켜보면 우연적인 사건에 나의 기질에 근거한 선택의 결합이 인연으로 포장되었고, 운명이 되었다. 운명은 우연의 연속이 아닌 미미한 선택의 흐름이다.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것도 각자의 고유한 기질에 근거한 선택이기에 상대적이고 주관적일 수 밖에 없는데, 그렇다보니 시간이 흐르고 선택의 순간들을 후회하기도 하지만, 또다시 비슷한 선택을 하는게 사람이다. 정원에 나무를 심을 때, 나의 기준은 나무들이 잉태한 꽃의 아름다움이 되지만, 건너편 할아버지들의 기준에는 아주 못마땅한 것이고, 그들은 수확될 열매의 풍성함에 따라 나무를 선택한다. 그래서 나는 봄에 아름답지만, 할아버지들은 여름에 풍성하다. 부족한 여름은 내가 선택한 결과이며, 운명이다. 기질에는 좋은 기질과 그렇지 않은 기질이 있을 수 있는데, 좋은 기질은 그대로 가꾸어야겠으나, 그렇지 않은 기질은 바꾸어야 한다. 하지만 기질이라는 것도 상대적이라서 선택한 결과들의 궤적을 따라, 스스로 판단해야만 한다. 가령 연민. 이 얼마나 고귀한 단어인가. 하지만 수많은 연민의 결과가 마냥 좋을 수만은 없는 것이 삶이다. 연민에 이끌려 숭고한 고양감에 나를 희생했으며, 착하다는 흐리멍텅한 언어가 유일한 구원이라 믿으면서 우유부단한 결정을 했으며, 거절하지 못해 쉽게 인연을 만들어 온 결과들이 나의 현재를 고통스럽게 한다면, 이제는 변해야만 하는게 아닐까. 시간은 나의 삶을 기다려주지 않으며, 타인은 나의 삶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인간은 변하지 못한다. 타인이 변화하길 바라는 일은 애당초 씨앗을 뿌리지 않고, 꽃이 피어나길 기대하는 것과 같아서 더욱 어려운 일이다. 정원의 씨앗을 뿌리는 일은 오직 정원가 스스로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정원가들은 흙과 하늘과 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 외부에서 주어진 것들에 저항하거나 순응하며 그저 바쁘게 움직일 뿐이다. 토양이 애석하면 거름과 퇴비를 흩뿌리고, 가뭄이 지속되면 물을 끌어오느라 안간힘을 쓰며, 세찬 바람이 불어오면 지줏대에 줄기들을 묶느라 쉴 틈이 없을 뿐이다. 하지만 기질을 바꾸는 일은 사실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건 인간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존재니까. 나의 행동과 생각과 말에는 모두 합당한 이유가 있다는 자기합리화의 최면에, 그동안 나는 허무하게 나의 시간을 잠재웠다. 현재를 가꾸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은 최면에서 벗어나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심연까지 빠져들어 알아야 한다. 나뭇잎이 말라버리는 정확한 병의 원인을 모르면, 뿌리강화제든, 살충제든, 줄기영양제든 아무리 좋은 것을 사용해도 효용이 없다. 사십 대에 정원일을 시도한 건, 어쩌면 내가 스스로 변하기 위한 안간힘의 소산이자 생존의 문제였다는 생각.
나는 알게 모르게 스스로를 바꾸려고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정원일을 시작했던 그 어느날의 언덕에서부터.
깊은 겨울이지만, 나무들의 새순에는 이미 봄이 자리한 것만 같다. 그들은 변화하고자 혹한에서도 스스로를 가꾸기에 바쁜 시간을 보낸다. 나무들은 그런 나에게 질문하곤 한다.
'무엇을 지키며 살아갈 것인가. 무엇을 버리고 살아갈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바꾸며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는지를 찾아가는 여정이 인생이라는 생각. 목련의 꽃눈을 바라보며, 내년에는 휠씬 더 탐스러운 목련화가 피어날 것이라 생각하고, 매 년 더 나은 꽃이 잉태하리라 기대한다. 그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시간이 나에게 얼마나 허락되어질까. 목련들이 몇십 년 후면 어떤 모습으로 자라 있을까. 그때까지 나는 곁에서 지켜볼 수나 있을까. 더 좋은 것, 더 나은 것들은 왜 늘 한 발짝 앞서 나를 기다리는 걸까. 운명의 가호로 고맙게도 나는 또다시 한 해 더 앞으로 나아가 목련화를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목련이 꽃눈으로 옷을 갈아입듯, 나 또한 나아가기 위해 변해야만 한다. 변화는 말과 글이 아닌, 행동으로 표현된다. 소소한 행동들의 변화는 어떤 의지를 품고 있을 수 밖에 없는데, 그것들이 일상을 바꾸고, 달라진 일상이 삶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그것이 인생이 되고, 나의 운명이 된다.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리 길지 않다. 더이상 내가 나 자신을 싫어하게 하고 싶지 않다. 바람이 파헤친 짚이불을 다시 긁어 모은다. 좋든 싫든 나의 운명은 내가 만들어가는 거니까.
덧. 날이 차갑습니다. 건강 잘 챙기시고, 따듯한 난로 앞에서 평온한 계절되시기 바랍니다.
작가님들, 독자님들. 항상 강건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