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기증'에는 세 번의 추락 사고가 등장한다. 추락 사고의 피해자는 세 번의 경우 모두 사망하고 주인공 스카티는 세 명 모두 구하지 못한다. 첫번째 사고는 현기증의 발병과 연관되어 있으며 두번째는 악화된 현기증과, 마지막 세번째는 현기증의 치유와 관련이 있다. 그중 두번째와 세번째 사고는 마치 하나의 사건처럼 연결되어 있어서 영화는 결국 하나의 커다란 사건을 해결함으로써 첫번째 사고로 발병된 현기증을 벗어나려는 스카티라는 형사의 치유 여정을 그린다. 가장 먼저 첫번째 사고, '동료 형사의 죽음' 후 현기증이 발병한 스카티부터 살펴보자.
매들린을 따라다니다 사랑에 빠지는, 두번째 사고 전까지의 스카티의 행동들은 사고 후 재판의 판결문이 깔끔하게 요약한다. ‘나약한 남자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타인을 구하는 것.’ 첫번째 사고로 범인을 놓치고 동료 형사의 죽음에도 간접적으로 엮인 스카티는 ‘나약한’ 상태이다. 그런 그는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보상방법으로 매들린 사건을 해결하는 것을 선택한다. 현기증으로 비롯된 형사로서의, 나아가 남자로서의 무력함을 극복하는데 매들린 구하기- 자신의 뜻에 따라 못 움직이고 죽음을 강요받는 여자 구하기-는 상당히 적합한 선택인 것이다.
매들린이 처음 등장하는 자동차 미행 장면에서 관객은 온전히 스카티의 시선으로 매들린을 그와 함께 훔쳐본다. 말없이 숨죽인 채 스카티와 함께 미로를 따라 들어가며 관객 또한 그녀의 이미지에 현혹된다. 초록색 드레스를 입고 초록색 차를 끄는 금발 여자. 닿기 어려운 미스터리를 강조하듯 그녀의 얼굴은 측면만 보이길 허락된다. 여기에 칼로타 이야기까지 추가되며 매들린은 스카티의 사건 해결 욕구를 극도로 자극하는, 현기증 극복에 딱 들어맞는 꿈속의 여인이 된다.
스카티와 매들린이 만든 애절한 로맨스의 세계는 매들린 추락 사고 후 외부인들이 들어오며 깨져버린다. 한 영화가 끝나고 두번째 영화가 시작하는 느낌을 주는 재판 장면은 사건에 객관성을 부여하며 관객을 꿈에서 깨우지만 스카티는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첫번째 사고와 두번째 사고를 연달아 경험해 동료 형사와 매들린의 죽음에 모두 관여한 처지가 된 스카티는 매들린이 묘사하던 꿈, 죽고 싶은 칼로타의 욕망을 스스로 꾸게 된다. 초록 옷을 입고 매들린을 닮은 여자, 주디를 보기 전까지 스카티는 사실상 죽은 상태와 다름없다. 그럼 주디를 만난 후에 그가 다시 살아나냐하면 그것도 아니다. 살아난 건 그의 생명력이라기 보단 대상에 대한 욕망이다. 그 욕망의 목적이 구출에서 재현 또는 부활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럼 스카티는 왜 매들린에 집착하고 주디를 매들린처럼 바꾸려고 했을까?주디 뿐만 아니라 미지도 거부하며 매들린에만 현혹되는 이유는 무엇일까?그녀가 이 세상에 없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미스터리와 죽음에 대한 이끌림이 두번째 추락 사고 전까지 스카티가 매들린에게 끌렸던 이유라면 매들린의 추락 이후 스카티의 무력함은 악화된다. 죽음에 대한 공포였던 현기증은 죽음에 대한 욕망이 된다. 절벽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타인을 끌어 올리려던 스카티는 그 손을 잡고 무덤속으로 같이 떨어진 셈이다.
스카티는 자신의 눈 앞으로 불러들여와 되살려낸 매들린이 진짜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것은 그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시 한번 소환된 매들린을 감싸는 초록 안개의 오묘한 아름다움과 섬뜩함은 ‘이미지에 빠진 사랑을 되살리는데 이미지면 충분하다’는 스카티의 뒤틀린 욕망에서 기인한다. 인간의 마음 속 채워지지 못하는 구멍이 완성될 것만 같은 환상을 주는, 장인이 만들어낸 가짜이다. 스카티이자 히치콕이라는 장인. 스카티라는 장인이 빚어낸 유령이고 히치콕이라는 장인이 영화로 한 자기고백이다.
주디를 매들린으로 바꾸는데 성공한 스카티는 곧이어 스스로 만든 감옥에서 나올 실마리를 찾는다. 주디가 곧 매들린이라는 걸 깨달은, 즉 매들린이 가짜라는 걸 깨달은 스카티는 두번째 사고의 현장을 재방문한다. ‘매들린 추락 사고’를 재현하며 그는 가짜인 것들을 똑바로 쳐다보고 그를 짓누르던 유령들, 나약함, 그리고 현기증을 떨쳐낸다. 동시에 그 유령들은 매들린의 탈을 쓴 주디에게 전이된다. 매들린이 칼로타의 유령에 지배받아 죽은 것처럼 주디는 종탑 꼭대기에 나타난 유령에 겁에 질려 죽는다. 죽은 칼로타가 존재하지 않는 매들린을 괴롭히고 그 매들린이 살아있는 주디를 휘어잡는, 칼로타-매들린-주디로 이어지는 기묘한 유령 공포 이야기를 떨쳐낸 스카티는 아래를 내려다보는 남자로 우뚝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