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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도형 Aug 27. 2022

이순신은 왜 고속승진을 했을까.

짧은 옛 이야기

조선왕조실록에서 이순신이 처음 등장한 때는 1587년(선조 20년) 음력 10월 녹둔도 전투때다. 당시 조산만호였던 이순신은 적의 공격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혔다가 국왕 선조의 명령으로 백의종군을 받고 전선에 다시 복귀한다. 다음으로 이순신이 등장하는 것은 2년 뒤인 1589년(선조 22년) 1월이다. 당시 조정(비변사)는 주요 신하들에게 무신으로 등용할만한 인물들을 추천하라는 공문을 내려보냈는데, 이때 추천된 무신들 중 이순신이 있다. 그는 두번 추천되는데 그를 추천한 사람은 이산해와 정언신이었다. 이산해는 우의정을 거쳐 막 영의정에 오른 시점이었다. 우의정은 '판병조사' 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며 병조 인사의 최종 감독권자다. 정언신은 1582년 함경도 도순찰사 자격으로 니탕개의 난을 토벌했고, 이 당시 이순신은 전선에 있었다. 정언신은 앞에서 말한 녹둔도 전투 시점에는 병조판서로 재직중이었다. 이산해는 이때 우의정이었다.

 

 그러니까. 녹둔도 전투에서 패배하고 백의종군 형을 받은 '끈 떨어진' 군인 이순신은 당대 군사 인사권 1인자와 2인자에게 나란히 추천을 받았다. 오늘날로 따지면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과 국방장관 모두가 이순신을 일 잘하는 사람이라고 판단했던 셈이다. 중세시대에 저 정도 급 고위관료에게 추천을 받았다는 건 저 고위관료들만 이순신을 알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적어도 이산해와 정언신, 이순신 사이에 있는 수많은 중간급 관료들과 무신들도 "이순신이 괜찮습니다"라고 추천했을께 뻔하다. 특히 아무런 빽도 뒷배도 없었던 이순신이라면 더 그렇다.

이산해 초상화. 이산해는 동인이었다.

 나는 이 추천이 이순신의 전격적인 승진에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2년 뒤인 1591년 선조는 당시 정읍현감이었던 이순신을 진도 군수, 가리포첨절제사를 거쳐 전라좌수사로 임명한다. 정읍현감이 종6품이었고 전라좌수사는 정3품이었으니 한 번에 품계를 8단계나 끌어올린 것이다. 그야말로 낙하산 인사다.

 오늘날로 따지면, 대통령이 직접 동네 향토사단에 있던 대대장 한 명을 픽업해서 갑자기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한 셈이나 마찬가지다. 오늘날에도 이렇게 대통령이 인사발령을 내면 당연히 잡음이 난다. 모든 언론이 난리를 쳤을게 뻔하다. 조선 시대 언론의 성격을 띄었던 사간원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사간원은 당시 임금-선조-에게 두차례나 "이순신 승진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천천히 하시죠"라고 장계를 올린다. 선조는 이 장계에 "나도 알긴 아는데 지금은 어쩔 수 없다. 이순신만 좀 예외를 하자"라고 답을 하고 좌수사를 밀어붙인다. 이게  결국 신의 한수가 된 건 모두가 아는 미래고.

 그러면 선조는 왜 이렇게 무리하게 인사를 강행했을까. 이순신이 역임한 전라좌수사라는 직책에 힌트가 있다. 당시 전라좌수사의 담당 영역은 50여년전 을묘왜변 당시 왜군이 상륙한 영역 바로 옆이었다. -당시 왜군은 전라남도 진도-해남-영암 쪽으로 밀고 들어왔다- 을묘왜변 후 조선 지도부는 문제점 사후 검토를 내리는데 그때 이런 결론이 내려진다. "수군에서 못막은게 문제였던 거 같다"고. 이후 조선 조정은 없는 살림을 짜내서 전선을 하나 만드는데 그게 판옥선이다.

 나는 이순신의 파격적인 승진 원인이 을묘왜변에 있다고 본다. 당시 을묘왜변에서 상륙한 왜군 숫자는 5000명 가량이었다. 1591년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건너갔다 돌아온 황윤길로 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상합니다. 처들어올꺼 같습니다"라고 보고를 들은 선조는 "야 빨리 방어태세 구축해"라고 지시하는데, 당연히 바로 직전 왜군과의 전투였던 을묘왜변에 대한 복습이 있을수 밖에 없다. 을묘왜변 당시 쳐들어온 왜군 숫자는 약 5000여명 정도로 추산됐다. 조선조정은 이번에도 이 정도 군세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 많아야 여기에 2~3배 정도라고 판단했을 확률이 높다. 그도 그럴것이, 임진왜란 10년전 조선이 맞은 최대 전투인 니탕개의 난 당시 여진족 군세는 약 3만여명 정도였다. 중세시대에 14만이나 되는 대군을 배로 실어나르는 정신나간 작전을 누가 생각했을까.

 '5000명 가량의 왜군이 전라도로 침입했다'는 직전 기록을 토대로 조선 조정이 세운 방어전략이라고 하면 결국 뻔하다. 전면에서 왜군의 방어를 맡는 전라우수영과 전라좌수영의 전력을 키우고 경상우수영과 경상좌수영을 예비전력으로 키우는 것. 이 문장을 읽고 다시 첫문장을 보자. 이순신의 첫 전투인 '녹둔도 전투'는 소수의 병력을 가지고 다수의 적군을 상대로 맞서 싸운 방어 전투였다. 이순신은 이 전투에서 1000여명의 적 기병을 상대로 수십여명의 아군만 데리고 끝끝내 방어를 하는데 성공해 낸다.

 왜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그렇게 급하게 임명했는지는 명확하다. 조선 조정은 '방어전의 마스터'였던 이순신을 왜군이 쳐들어올 것으로 예상되는 방어선 전면에 배치한걸로 봐야한다. 그래야  이순신이 갑자기 전라좌수사에 임명된 이유가 이해가 된다. 여기서 이산해와 정언신의 추천이 등장한다. 흔히 선조가 류성룡의 추천을 받아 이순신을 임명한걸로 이해하지만 당시 조선 조정은 그렇게 만만한 동네가 아니다. 한번에 8번의 단계를 뛰어오를 정도의 급속 승진을 하려면 류성룡 한명만의 추천만으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조정 전반부의 묵시적 동의,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최소한 군부 내에서의 묵시적 동의가 없었다면 이뤄지지 못할 결정이다. 분명히 선조는 주위에 "야 좌수사에 박아넣을 만한 사람 누구냐"라고 수소문 했을거고, 거기서 안보실장과 국방부장관한테 추천받은 바 있던 이순신이 눈에 띄었을거다. 선조는 분명히 왜 추천받았는지 기록을 검토했을 것이고, 당시 같이 임진왜란을 대비하던 류성룡에게 최종 점검을 했던 걸로 봐야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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