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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hnnie et Travis May 15. 2023

함께 있다면

3교시


  우리들이 함께 있다면, 당신은 어디인가? 여기는 누구인가? 아니면 저쪽이 다른 누구인가? 도처에서 ‘혼합’의 냄새가 나의 냄새도 당신의 냄새도 알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라고 입에 올리지 않는 편이 더 나을 상태에 있다면, 차라리 저 멀리 바라보게 되는 저쪽에 다른 우리가 있는가?

  내가 가려는 <방향>에서 당신을 발견한다면 그 방향 어딘가에서 우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라는 표현을 오직 공존에서만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혼합은 공존과 다르다.

  피아간의 부자연스러운 혼합은 나와 당신이 고립이라는 개성의 저주에 걸리지 않는 일에만 열중하느라 각자가 물려받은 대립들을 배반했다는 점에서 촉발된다. 대상이 나에게 바라는 개성은 주체가 만족시킬 수 없는 어떤 까다로움에서 선취점을 찾는다.

  결국 이 득점은 내가 명령한 것이다.

  아니다, 나는 나의 득점을 원할 수 없었고, 만사가 가까이 있을수록 나의 존재는 그런 것들에서 더 멀어져 왔다. 나는 개성의 저주에 뛰어들었으니, 그것은 무릇 그 자신이 내리는 자유의 선고이다. 그러나 자유이기 이전에 사회를 의식한 자는 그것을 자발적으로 내리는 유죄선고와 같이 느낀다. 무슨 까닭으로 나는 나를 그 정도로 고립시키는가? 그것은 외부로부터 온 거짓 약속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의 성의가 나의 친절에 값하는 것이다.

  너의 공감이 나의 동기에 값하는 것이다.

  너의 인정이 나의 노력에 값하는 것이다.

  거짓 약속들은 설득력에서 나무랄 데가 없었으니, 까다로운 구조를 견뎌내기 힘든 누군가의 그림자는 타인의 그림자를 부른다. 그림자를 특정 짓는 관계들 가운데 그 어떤 것을 통해서도, 나에 대한 앎을 부수어버리는 타인의 본질을 파악할 수는 없다. 무언가를 상대에게 원하면 상대는 나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을 망각하고 그저 그의 욕망에 상응하는 자신의 욕망만을 발상하게 된다. 그것이 서로의 수지에 맞으면 일종의 거래가 성립되고, 맞지 않으면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조율에 대한 환상에 빠져 스스로 거짓 약속들의 일부가 된다.

  그림자는 빛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림자는 오직 ‘자각’할 수 있는 힘으로서만 소진된다.

  그렇다면 무엇을 깨달으려고, 어떤 경종에 값하기 위해, 나는 당신에게, 그리고 당신은 나에게 원하는가? 오래된 습관 중 하나로, 밤낮으로 나를 위하고자 하는 원형적 이기심은 이미 제 역할을 다한 지 한참이지 않나? 거래의 가능성은 언제까지 트여 있을 셈인가? 다들 세상에 거저는 없는 법이라고 말하는데, 상대가 가장 원하는 것과 내가 가장 주기 쉬운 것이 일치될 수 있는 경우조차 쉽지 않은데, 하물며 가장 완벽한 거래조차 이다지도 비인격적이고 소모적이라면.

  어떻게 그 일이 벌어졌는지는 몰라도, 그 일이라, 하지만 나는 당신과의 사이에서 우리에 관해 한 일은 있었지만 나에 관해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 일이라, 이를테면 당신이 오류를 저질렀다는, 내가 기분으로 알아차린 그 일, 그런 후에 기어코 당신이 스스로 부끄러울 수 있도록 안내한 일, 만일 당신이 내가 좋아하는 당신의 개성을 결국 혹평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면, 자유를 잃은 당신의 본질을 내가 찰나 봤는지는 일일이 기억할 수 없지만, 무서움과 슬픔 속에서 그것을 다시 삼켰다.

  불행히도 내가 숭배하는 논리는 터무니없지 않았으니, 공명정대한 얼굴을 하면 빈 손, 빈 눈, 빈 가슴조차 권위를 가지는 법이다.

  <악습을 제거하라.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 안에 온갖 이기, 일방, 공격, 억압을 쌓으며 그것을 타인과 자신에게 표출하는 것과 관련된 모든 습관을 잘 분별하고 개선해 나가는 데 힘써라.>

  나는 바라보려고, 당신의 본질을 보려고, 들끓는 기분 옆자리에 난 작은 입구를 찾는다. 이렇게 비대해져 있는 기분을 달고 그곳으로 어떻게 들어갈 수 있지? 내가, 당신과의 사이에서, 평생 나에 관해 정말 아무 일도 안 하고 버틸 수 있을까.

  시궁창을 약간 비낀 공터에서 땀이든 울분이든, 축축하고 곤혹스러운 것들을 말려내라. 장엄하고 도취적인 빈 손, 빈 눈, 빈 가슴을 바라보라. 이것이 나의 모습이오. 바라보고 싶은 당신이 내게 다가왔으니, 당신은 부디 당신의 자유 속에 있으라고 말할 것도 없지, 지금은 내가 나를 먼저 바라보게 해 주시오.

  비록 나는 당신의 오류와 만나버렸다고 여겼지만 당신의 도래하지 않은 시간을 망각시키는 저주를 풀 시간을, 당신의 미숙함에 매료될 기회를 주오.

  이제 입구 안으로 한 발만 디밀어 놓으면 나는 기회를 얻으려고 신날 테고, 걸음마 같은 낯선 보행을 시작할 것이다. 나는 나의 불편과 상대의 오류를 분리해 냈으니 어쩌면 죄가 가벼워지기라도 했을지 궁금할 것이다. 나의 불편은 오롯이 내 몫이고 나의 오류라고 떳떳이 움찔거리면서, 실상 상대의 오류와 만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오류와 만난 것이라는 사실에 관한 한 양심은 어떠한 도피도 불허했으니, 이제 남은 싸움은 수치심과의 담판이리라.

  당신은 이제 더할 나위 없이 당신인데, 나는 나의 오류가 지금의 얼굴이구료.

  불편 정서는 내가 운용하고 있던 악습의 발현이지 절대 당당한 권리가 아니었으니, 부끄러우면서도, 그러나 내게 반드시 필요한 부끄러움이다. 내가 당신 앞에서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을 수도 있는 가능성을 다른 무엇도 아닌 험악한 정서상태가 일러주었으니, 거짓 약속을 받아내려는 조건반사로부터 등을 돌리고, 바로 거기서 마침내 빛을 가리키는 그림자의 소진을 꿈꾼다.

  그저 나이기를 더할 나위 없는 나임을, 당신이기를 더할 나위 없는 당신 옆에, 괜찮다면 아주 가까이에 놓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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