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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hnnie et Travis Jul 24. 2023

그 목소리


    최단시간 내에 처리하길, 본능을 따를 것인가, 의식을 따를 것인가.


    목소리 이전에는 외면적인 것들이 기승을 부렸다고 말했었다. 이것 역시 내가 지닌 수단 중의 하나이다. 어느 순간에, 가령 삶이 주어진 이래 호기심이 놓은 현상이나 사물들을 개인적인 배움으로 알아가는 데 족했던 순진한 즐거움을 강탈한 질문을 마주했을 때, 말하자면 자의식은 이상을 갖추고 더없이 단순하게,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너는 누구인가?


   당시 수준에서 이것은 어떻게 봐도 최종적인 물음이자 직시였고, 진흙이 쏟아져 들어오고 나서야 진흙 속에서 열린 어떤 문이었다는 것을 알리는 개방이었으니, 그리하여 세상 모든 것이 자극적이라 감각할 때야말로 불현듯 내가 나임을 자각할 불안정한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당사자에게 자의식은 어쩔 수 없이 결코 상투적일 수 없다. 그것은 늘 낯설고, 어색하고, 부담스럽고, 어쩌면 영원한 통증에 해당하고, 파헤치는 만큼 팽창하고, 무탈한 정신 상태를 고려해 회피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으니, 최고의 관점은 설명 불가능한 자극으로 하여금 완벽하게 나를 설명하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작동한다.


    풋내기에게 아직 ‘시간’이 아니더라도, 자신과 관련되었지만 ‘잃어버린 무엇’을 찾는 것은 <불확실한 미래에 통증을 느끼는 것>과 유사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나’의 정신 속에 열리는 <의미>들 때문에 나는 그 어떠한 자극도 <무의미>로 분류한 적은 없었다. 차마 그럴 수 없었다는 말이다.


    어떤 양심적인 사람은 말했다. 궁극의 의미는 다가올 것에 닿는 경로요, 길이요, 다리라고.


    나는 자신이 파괴될 수도 있겠다 싶은 악인과 결부된 핵심경험이 없었기에 그 어떤 밉살스러운 이조차 그 자체로 생소하지만 빛나는 감각적 기회로서 주어진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대부분의 실존은 주목할 만한 사건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대수롭지 않은, 그러나 상기 언급했듯 자신의 비밀을 공개하는 최고의 관점에 의해 현상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내가 나로서 살아가는 데, 때때로 나는 영원히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나는 아직 나를 너무도 모르기 때문에 굴착하는 과정 중에 있어야 함이 필연적임에도 불구하고 도래하지 않은 자기 정체에 대한 결론에 부담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의 개성보다 허약하고 게으른 독백은 특이화의 실현에 완전히 등을 돌린 말들이 아니었다. 면접 대기실에 갇힌 사람처럼 미래의 자신을 멀찌감치 느끼며, 갑자기 저기 진흙 위에서, 또는 속에서, 또는 아래서 나는 나를 본다. 나는 나를이라는 말을 마치 어떤 누가라고 말하듯이 마치 그 옛날 그가라고 말하듯이 말한다.


    사적일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공간에 나는 나의 일부를 제목이 밝혀지지 않은 책처럼 뒤로 접어 넘겼고, 도저히 쾌적하게 읽어 내려갈 수 없을 듯한 오브제와 같은 고정에 만족하거나, 최소한 개의치 않아도 보였다. 나는 내게 무엇보다 세상에게 공손한 척했고, ‘질문’에 대한 공손한 답변은 어딘가 유리된 감응에서 필수적인 부분까지 단절시키지 않기 위함이 가공되어 있었다.


    이럴 때의 나는 마치 쪼그려 앉아도 되는 바지와 비슷했고, 무릎 부위는 일어났을 때 성공적으로 보기 싫지 않았다. 그렇지만 극히 쁘띠한 움직임에 맞춘 삶은 얼마나 단조로운가. 그 감지덕지한 자극들, 그 고귀한 타인들은, 연진이도 아닌 이들은 어디로 갔나?


나는 책을 그냥 펼쳤다. 그래야 하는 형태대로, 아니, 다시 접었다. 결코 크지 않은 책이었다. 믿음을 들으며, 믿음을 가지며, 그렇지, 이제는 말하건대 분명코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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