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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hnnie et Travis Jan 09. 2024

235-11

고통에 영감을 준 자기 연민의 성벽들도 통제력을 굴복시키지 못하리라




  대치되고 상치되는 상황이 얼마나 명백하냐,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미 감정적 부자유함, 원통함, 서운함, 조급함, 안달 남 등과 같이 비자립성을 표현하는 그러한 감정이 이미 이곳을 지배하고 있다면, 어떻게든 이상을 달성하는 것 또한 이상주의의 근거에 집착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국면이란 자연선택된 무엇이다. 자연선택에 저항하는 모든 것은 자신이 지금 어떤 기분에 해당하는지 자기에게 설명하는 데 걸리는 것보다도 짧은 시간 내에 여지없이 현재를 무효로 만들어줄 것이다. 이미 새로운 국면이 결정 난 이상, 어느 한쪽의 노력에 의한 것이든 자연스러운 흐름이든 간에, 현재가 아닌 시간은 존재할 수 없으며, 현재는 유보되지 않으며, 분석하고 복기하는 노고에조차 재현의 영광은 주어지지 않는다. 다만 현재에 의해 시간은 시시각각 떠나고, 또 떠나며, 다시 떠나가거늘, 한편 현재에 의해 청산되지 않은 감각만이 과거로 끌려들어 가 사그라든 저항감이 다시 부추겨진 순간 진행 방향이 부재한 시간에 갇혀버릴 뿐.

  재현과 복기로의 유배. 이 형벌을 통해 절감하는 불행은, 이미 현재 몰입의 문이 다시 닫혔고, 나는 내쳐졌고, 때로는 제 발로 나와버렸고, 이제 다시 들어가기 위해 또 다른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통제의 효율을 경시한 대가는 피로감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지 말라. 그 입장은 죽었거나 죽어가는 중이며, 의미에 대해 추론 불가한 선행사건처럼, “그래서 내 입장은 뭐였더라?”라고 한 번 읊어보라. 아마 “내가 이 서랍에서 뭘 찾으려고 했더라?”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가질 테니. 죽은 입장을 대체해 버린 것은 그 잔물들, 그러나 새로 탄생했다고 봐도 무방할 법한 비의지의 추종자들, 상기의 그 애처로운 감정들은 크나큰 거부의 폐허 속에 내몰리지 않으려고 죽은 입장을 대신해서 쪼르르 달려왔으렷다. 고얀 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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