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이야기는 별, 궤도이탈도 없이

9. 이야기는 별, 궤도이탈도 없이

by 파랑

아침샤워를 재빨리 마치고 식탁에 앉았다. 낙타들의 아침식사. 할머니와 나 사이에 보글보글 끓는 두부전골이 있었다. 두부전골까지 치면 세 식구. 내가 가장 먼저 깨우친 숫자, 셋. 둘보다 따뜻한 숫자. 나, 할머니, 아빠.

“아빠가 불쌍하다.”

“뭐가?”

“끝내주는 이 두부전골도 못 먹고……. 이번 출장은 며칠간이야?”

“세월이 빠르지 않니? 너도 이제 적은 나이가 아니다.”

할머니가 넌지시 건너다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날이 식탐과 농지거리만 는다고 생각한 거였다.

“알아. 언제부턴가 지구가 태양 주위를 점점 빠른 속도로 도는 것 같애. 나이 들면 속도가 더 빨라진다며?”

할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째려보았다.

“할머니, 아주 옛날 사람들은 지구가 도는 게 아니고 해가 돈다고 생각했잖아. 아침에 해가 동쪽 우물에서 쑥 나와서, 하늘을 한 바퀴 쭈욱 돌고 서쪽 우물로 쏙 빠져 들어가고, 밤에는 반원모양의 땅 밑 동굴을 슬슬 뚫고 들어가고, 다음날 아침에 해가 다시 동쪽 우물에서 쑥 솟아 나온다고 생각한 민족도 있었대. 또 어떤 민족은, 지구를 빙 둘러싼 강이 있는데, 큰 배가 해를 실어서 동쪽에서 서쪽으로 운반하고 밤중에는 북쪽을 쭈욱 돌고 다음날 아침에 다시 동쪽으로 오고, 그런다고 생각했대. 쇠똥구리가 해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굴려줘서 해가 뜬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대. 재밌지? 동화 같지?”

내가 헤헤거리며 할머니 눈치를 살폈다. 할머니가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눈을 흘겼다.

아주 옛날에는 모든 별들이 동그란 원운동을 한다고 생각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물론이고 코페르니쿠스까지도. 나중에 케플러가 타원운동이라는 걸 밝혀낸다. 타원 궤도로 운동하는 별들은 태양에 가까워지면 빨리 돌고 태양에서 멀어지면 느리게 돈다.

순하게 고개를 숙이고 식사하는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내가 많이 아팠던 그날이 또 생각났다. 할머니가 창밖으로 내보낸 당금애기 이야기가 또 생각났다. 내 기억 속에서 결코 휘발되지 않는 이야기. 할머니의 그 이야기야말로 지금껏 내 주변을 빙빙 돌고 있었다. 나로부터 가까워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면서. 나는 지금에야 눈치 챈다. 그 이야기가 나를 중심으로 타원운동하고 있었구나. 긴 세월동안 궤도이탈도 하지 않았구나. 그래서 나도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은 거구나. 기쁨이 가슴에 차오르며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단한 인연을 깨달은 기분이 되었다.

“할머니, 두부전골 진짜진짜 맛있다. 이거 어떻게 만드는 거야?”

나는 목소리 톤을 높여 호들갑을 떨었다.

“두부, 파, 표고버섯, 당근, 소고기, 마늘 이런 거 다 넣고 그냥 퐁퐁 끓이면 되는 거야?”

할머니가 쯧쯧, 혀까지 찼다. 나는 열과 성을 다해 두부전골과 밥을 퍼먹었다. 할머니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이 영원히 반복되었으면 좋겠다. 맛있고 행복한 시간의 영원한 회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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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밥을 먹고 시작했던 하루. 그래서 더 알차게 보내려고 애썼다.


저녁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걸터앉아서 용태에게 전화를 걸었다. 종일 용태의 푸른 수염과 두드러기에 신경이 쓰였다. 몸이 말썽을 부리면 정말로 만사가 괴로워진다.

“어디야?”

“집. 오늘은 엄청 피곤하고 으슬으슬해서 그냥 일찍 들어왔다.”

내가 잘했어, 라고 말하려는데 용태가 바로 말을 이었다.

“감기까지 괴롭힐 기세야.”

“감기까지? 아이고……, 두드러기는 어때? 수염은 어떻고?”

“수염은 좀 주춤해서 한숨 돌리고 있고, 두드러기는 기세등등하고…….”

“감기 심해지기 전에 병원에 가.”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그것뿐이었다.

“병원을 편의점 들락거리듯 드나든다. 요 몇 달 동안. 오늘도 많이 바빴어. 내일 스케줄도 장난 아닌데…….”

“감기 초기에 갔다와. 그냥 견디지 말고. 너 면역력이 많이 떨어진 것 같아. 호르몬 균형도 깨진 것 같고. 일보다 몸이 중요하잖아.”

뻔한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뻔하디 뻔한 말밖에 해주지 못해서 용태에게 무척 미안했다.

“다 때려치우고 좀 쉬고 싶은데, 매달 고정비 지출 때문에……, 뭘 줄여본다고 해도 방값이 제일 문제지.”

“오늘은 그냥 편히 자. 감기몸살 심해지기 전에. 어서 자.”

또 뻔한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용태가 잠이라도 푹 자기를 바랐다. 평온하고 고요한 잠이 용태에게 깃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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