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아빠의 양말

10. 아빠의 양말

by 파랑

나는 안국동의 정독도서관에서 책을 찾느라 서가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지금은 절판되어 더 이상 서점에서 살 수 없거나, 중고서점에서 비싼 값으로 거래되는 세계명작소설들을 봐야 할 때는 정독도서관에 온다. 소수의 독자만 알고 있는 좋은 책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 숨어 있다. 그런 보물들을 보관해놓은 곳이 도서관이다. 나는 국가별로 분류해놓은 서가를 훑어보았다. 도통 찾을 수가 없어서 사서에게 청구기호를 적은 쪽지를 내보였다. 사서가 책을 건네줄 때 그미가 퍼뜩 떠올랐다. 내 속에 기억 한 조각도 없는 사람. 이런 도서관에서 근무했다고 들었다. 나는 생각을 바로 지워버리고 독서에 집중했다.


아르바이트 시간이 다가와 정독도서관을 나왔다. 가을이 사그라질 듯이 서슬 퍼런 바람이 몰아쳤다. 맹렬한 바람이 턱밑까지 위협했다. 피까지 서늘해지면서 온몸이 오싹해졌다.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은 날씨였다. 나는 몸서리를 치면서 편의점으로 향했다. 용태를 생각했다. 오늘은 어땠냐고, 기운을 내서 살아보자는 문자메시지를 보내야지, 생각했다. 마침 전화벨이 울리며 낯선 번호가 떴다.

아빠 이름을 말하면서 딸이 맞는지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다급하게 말을 전했다. 아빠가 원주의 건설현장에서 사고를 당했다고. 가까운 병원에서 응급처치를 하고 서울로 향하는 중이라고. 서울대학병원으로 갈 예정이라고.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사지가 벌벌 떨렸다. 할머니에게 전화하려던 참에 전화가 왔다. 할머니에게 먼저 소식이 닿았던 거다. 할머니 목소리를 듣자 울음이 터졌다.

“민주야, 정신 바짝 차리고……, 택시 잡아타고 와. 서울대학병원으로. 정신 바짝 차리고. 서두르지 말고, 조심해서 와. 알겠니?”

할머니의 목소리에 냉정을 지키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할머니와 내가 서울대병원에 먼저 도착해서 아빠의 앰뷸런스가 도착하길 기다렸다. 할머니는 그새 아빠의 속옷과 양말 등을 챙겨왔다.

삼십 여분쯤 기다리자 아빠의 구급차가 도착했다. 아빠를 실은 침대가 할머니와 나를 순식간에 지나쳤기 때문에 아빠의 얼굴을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머리는 붕대로 감겨져 있었고 몸에는 담요가 덮여져 있었는데 두 발이 담요 밖으로 삐죽이 나와 있었다. 짙은 청색바탕에 하늘색 도트가 자잘하게 찍힌 양말을 신고 있었다. 아빠의 양말을 그토록 짧은 시간에 그토록 자세히 본 건 처음이었다.

현장에서 일을 보던 아빠에게 철근이 쏟아졌다고 했다. 헬멧은 쓰고 있었는데, 옆에 있던 직원을 밖으로 밀치면서 쓰러졌다고 했다.

아빠는 바로 수술실에 들어갔고, 할머니와 나는 정지된 시간 속에 갇혔다. 시간이 강철처럼 단단해졌다. 강철 속에 숨 막히게 감금된 나는 부드럽고 향기로운 것들, 자유로운 것들을 상상해보려고 애썼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할머니와 나는 아주 가끔씩 가까스로 숨을 내쉬면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내 머릿속엔 아빠의 청색 양말만 자꾸 떠올랐다. 할머니가 사준 양말. 아빠는 그 양말을 몇 번 신었을까? 양말은 몇 번 신어야 닳아 해져버리나? 아빠는 한평생 몇 켤레의 양말을 신었을까? 아빠가 현장으로 돌아다닌 거리는 얼마나 될까?

할머니의 눈에서는 독기가 철철 흘렀는데 한 곳만 응시하며 꼼짝하지 않았다. 흐름을 멈춘 시간 속에서 할머니와 나는 점점 더 숨쉬기가 힘들었다.

기도 같은 걸 모르고 살던 나는 가장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아빠를 살려주면 뭐든 다 하겠습니다. 할머니도 물론 기도를 했을 것이다. 늙은 저를 데려가고 아범을 살려주십시오. 할머니와 나는, 아빠를 살리는 대신 그 대가를 충분히 치르겠다고 맹세하고 맹세했다. 이런 불행한 사고가 왜 우리 가족을 덮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아빠의 생명 대신 뭐든 다 갖다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어떤 신에게든.

어떤 신도 기도를 듣지 못한 걸까. 할머니와 나의 기도가 부족했던 걸까. 아빠는 수술이 끝나고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수술 후 다섯 시간을 버티다가 할머니와 나의 곁을 영원히 떠났다. 아빠가 이런 식으로 할머니와 나와 작별할 줄 몰랐다. 한마디 인사말도 하지 못했다.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했다.

비극은 인간 삶의 조건인가. 아무런 인과관계 없이 불쑥 닥친다. 비극 속에서 사람은 어떻게 정신의 균형을 찾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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