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꿈과 현실
할머니는 아버지 장례를 차분하게 치렀다. 할머니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나는 다시 알게 되었다. 내가 상주노릇을 제대로 하도록 하나하나 다 가르쳐주고 보살펴주었다. 내가 너무 많이 울어서인지,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나 몰래 울었는지 모르지만.
아빠를 화장하고 납골당에 모시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생각했다. 아빠가 집 밖에 애인이라도 만들어두었다면 좋았을 텐데……. 할머니와 나 말고, 따로 사랑을 나누는 상대가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연인이 남자든 여자든, 젊든 늙었든. 정신적인 관계든 육체적인 관계든. 이번 생은 사랑을 흘러넘치도록 받으며 살고 있네, 라고 생각했다면 좋겠다. 어린 시절의 써늘한 빈터에 사랑이 내려앉아 사랑이 넘치고 넘친다고 아빠가 생각했다면 좋겠다.
아빠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았을까?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살았을까? 아빠는 잘 웃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얼굴빛이 어둡지는 않았다. 늘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살았다. 속으로는 보통남자와 똑같은 오욕칠정에 시달리며 살았을 것이다. 오욕칠정의 바다에서 헤매는 것은 모든 생명의 공통된 운명이고, 운명 속에서 아빠는 따뜻한 가정의 안정감과 평화를 누리며 살았다고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아빠가 불행하게 살지는 않았을 거라고 나는 애써 생각했다.
이제 나는 할머니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할머니를 잘 지켜야겠다고 다짐했다. 할머니를 더 이상 고생시키면 안 된다. 할머니가 행복을 느끼도록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질문하고 또 질문했다.
누군가 이불을 덮어준다. 이불을 또 덮어준다. 이불을 한 채, 두 채, 세 채…… 자꾸 덮어준다. 이불이 점점 무거워진다. 덥다. 더운 건 둘째 치고 이러다가 숨통이 막히겠다. 잠이 쏟아지는 두 눈을 억지로 뜬다. 잠자는 나를 내려다보는 누군가가 있다. 나는 섬뜩해서 잠이 확 달아난다. 눈을 크게 뜬다. 아빠다. 아빠가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다. 내 이불을 토닥이고 있다. 아빠가 나에게 이불을 자꾸 덮어준 거다. 나는 아빠, 소리치며 일어나려고 한다. 아빠가 나의 어깨를 지그시 누른다. 아빠에게 할 말이 많다. 아빠는 부드러운 눈길로 나를 마냥 내려다볼 뿐이다. 아빠가 앉아 있는 옆과 뒤에는 이불이 잔뜩 쌓여 있다. 아빠는 이불만 만지작거린다. 이불은 포근한 잠이 오도록 부드러운 연노랑, 연분홍, 연하늘, 연주황, 연보라…… 색들이다. 저 이불들로 나를 자꾸 덮어주었구나. 이불을 너무 많이 덮으면 내가 답답하고 숨이 막힐 텐데. 아빠는 왜 자꾸 이불을 덮어주나. 아직 겨울도 아니고, 겨울이어도 내 방은 난방이 잘되는 방인데. 내 방이 늘 따뜻하도록 할머니가 신경써주는데. 아빠가 또 이불을 끌어당겨 나에게 한 채 더 덮어주려고 한다. 아빠, 무거워. 그만해. 숨 막힌다고. 목소리가 안 나온다. 소리치고 싶다. 그만해. 이러다 딸 죽이겠어. 소리치고 싶다. 내 목소리가 안 나온다.
나는 잠에서 퍼뜩 깼다. 자리에서 몸을 급히 일으켰다. 침대에서 내려서서 벽을 더듬어 전등을 켰다. 가슴이 격렬하게 벌떡거렸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심호흡을 크게 했다. 아빠는 온데간데없고 이불들도 온데간데없다. 이게 무슨 꿈일까? 아빠가 꿈에서 나를 데려가려고 했나. 아빠가 자꾸 덮어주는 이불은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었을까? 내가 가만히 이불을 차곡차곡 다 받았다면, 나는 아빠를 따라 죽음의 세계로 갔을까?
찬바람을 쐬고 싶어 나는 거실로 살며시 나갔다. 베란다 창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캄캄하고 묵직한 하늘에 희미한 뭔가가 잠깐 반짝이는 듯하더니 이내 사라졌다. 아빠, 왜 자꾸 이불을 덮어준 거야? 나한테 이불은 너무 무거웠어. 숨이 막힐 것 같았다고. 왜 자꾸 이불을 덮어준 거야, 아빠? 눈시울이 뜨끈해졌다. 나도 알고 있어. 인생이란 무거운 거라는 걸. 아빠가 죽지 않았다면 덜 무거울 텐데. 다 아빠 때문이잖아. 나를 낳은 것도 아빠잖아. 할머니보다 먼저 죽은 건 정말 아빠 잘못이잖아. 모든 게 다 아빠 잘못이라구. 그래도 할머니 잘 모실게. 그런데 아빠, 나…….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치솟는데 분출될 틈이 없었다. 호흡이 가빠졌다. 아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안 해주겠지? 사지가 부르르 떨렸다. 나는 베란다 창문을 조용히 닫았다. 할머니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내 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나는 그만 우뚝 멈추었다.
“할머니…….”
할머니가 거실에 나와 있었다. 거실 전등도 켜지 않은 채. 할머니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나는 먼저 거실의 전등을 켰다. 할머니에게 다가가 할머니 팔을 잡았다. 할머니는 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섬뜩한 느낌이 들어 할머니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할머니가 내 눈과 마주치지 않았다. 할머니는 저 먼 어떤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