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낯선 여자
어느 날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저어, 정민주 씨 맞죠?”
목소리가 다소 굵었지만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톤이었다.
“좀 만나고 싶어요. 빠를수록 좋겠는데, 언제 시간이 될까요?”
나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만나려고 할머니를 떼어놓고 외출하기가 싫었다. 내가 거절하려는 순간에 상대방이 다시 말을 덧붙였다.
“중요한 일입니다. 할머니와 아버지를 잘 아는 사람이에요.”
상대방의 목소리가 어쩐지 절실하게 들렸다.
나는 아파트 앞의 가장 가까운 커피집을 알려주었다.
낯선 여자가 내 테이블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정민주 씨 맞죠?”
나는 고개를 까닥였다. 여자가 좌석에 앉으려다 멈추고, 뭘 마시겠냐고 물었다. 나는 캐모마일이라고 일러주었다. 조금 후 여자가 캐모마일 찻잔과 아메리카노 머그컵을 쟁반에 받쳐 테이블에 놓았다.
“미안합니다. 갑자기 연락해서 나오라고 해서요.”
나는 낯선 여자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며 어서 용건을 말하기를 기다렸다.
“민주야, 미안해. 엄마다.”
여자가 불쑥 말을 뱉었다.
무슨 기막힌 소린가. 이제는 사기꾼까지 달라붙나. 나는 계속 무표정하게 중년여자를 응시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니 엄마 맞아. 증거를 보이라고 하면 얼마든지 보일 수 있어. 아빠가 돌아가시고 할머니가 아프시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귓속이 먹먹해지며 외부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주 낯설고 머나먼 곳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캐모마일 한 모금을 천천히 넘기며 호흡을 정리했다. 여자의 이목구비를 살폈다. 할머니를 닮은 구석도, 나와 닮은 구석도 보이지 않았다. 그미의 대학시절 사진을 떠올려보았지만 전혀 닮지 않았다. 여자는 짧은 단발 헤어스타일에 옅은 화장을 했다. 눈빛은 계속 일렁였다. 연갈색 코트에 굽이 높지 않은 갈색 앵글 부츠를 신었다. 앵글 부츠와 같은 갈색의 가죽 토트백을 들었다. 전체적으로 세련되고 고상한 차림이었다. 나는 아주 가끔 아무런 감정 없이 호기심으로 ‘그미’라는 사람을 상상해볼 때가 있었다. 책이 엄청나게 많은 도서관에서 책을 정리하거나 책을 읽고 있는 여자를 상상하곤 했다. 내 앞의 여자는 미용실이나 거실에서 여성잡지 따위를 뒤적거리고 있을 타입이었다. 갑자기 참을 수 없는 적의감이 솟구쳤다. 속에서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너를 버리고 집을 나왔지만, 할머니와는 연락을 계속했어. 니가 잘 커가고 있는 걸 다 알고 있었어.”
거짓말이다. 그럴 리가 없다.
“민주야, 너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이렇게 만나러 온 거야. 집에 불행한 일이 없었으면 나는 영원히 너 앞에 나타나지 않았을 거야. 그럴 자격이 없어서, 늘 그걸 다짐하면서 살았거든. 그게 당연한 거잖아. 그런데 너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생겼어. 그게 뭐냐면……, 너, 할머니를 집에서 보살피지 말고 요양병원에 모셔야 돼. 그게 할머니를 위해서도 너를 위해서도 최선이야. 너는 얼마 안 가 지치게 돼. 스물네 시간 붙어 있는 건 불가능하잖아. 할머니 안전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어. 너도 너 인생을 살아야 되는데, 아, 미안, 오해하지 말고, 이기적으로 할머니를 버리고 살라는 게 아니고……. 미안하다……. 할머니 병원비는 아빠 퇴직금하고 연금으로 해결될 테니까, 너는 너 인생을 살아. 돈도 벌면서 너 하고 싶은 일을 해. 그게 어른답게 사는 거야. 너무 슬프겠지만 할머니랑 떨어져 있는 시간을 차츰 가져야 되지 않겠니? 할머니 보러 자주 가면 되잖아……. 니가 좋은 병원을 찾아봐.”
낯선 여자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그야말로 줄줄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웬 여자가 이런 말을……,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재수 없고 못마땅해서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이 말을 해줘야 할 것 같아서…… 그래서 널 보자고 한 거야.”
중년여자가 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네주면서 깊은 한숨을 연방 내쉬었다. 여자도 눈물을 흘렸다. 나는 손수건을 받지 않고 옷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얼굴을 아무리 뜯어봐도 할머니와 나와 닮은 구석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나는 낯선 여자와 더 이상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내 마음속에는 할머니와 아빠 이야기로 가득 차 있어서, 어느 누구의 이야기도 더 들어올 틈이 없었다. 나는 여자를 그대로 두고 커피집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