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망망대해

12. 망망대해

by 파랑

정신적인 충격 때문에 할머니가 일시적으로 현실감을 잃어버린 거라고 생각했다. 할머니는 침대에만 누워 있었고 식사도 전혀 하지 못했다. 초점 없이 나를 바라보는 듯하더니 이내 눈을 감아버렸다. 내가 누군지 못 알아보는 건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앰뷸런스를 불렀다. 할머니는 병원에서 링거를 맞으며 이틀을 머물렀다. 이런저런 검사를 받았지만 병원에서도 정확하게 얘기해주지는 않았다. 더 지켜보자면서 약을 처방해주었다. 할머니가 간신히 기운을 차려서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할머니 옆에 붙어서 할머니를 보살피며 약을 꼬박꼬박 먹였다. 할머니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고 식사는 조금 하다가 말았고 나와 눈을 마주치는가 싶으면 곧바로 초점이 흐려지며 허공으로 시선을 옮기거나 눈을 감아버렸다. 집안의 모든 창문마다 암흑이 가득 차올랐고 온기는 급속도로 빠져 달아났다. 공기마다 균열이 생겼고 희미한 흐느낌이 메아리쳤다. 흐느낌은 내게서 조심스럽게 빠져나오는 것이었다.


결국 할머니는 치매 진단을 받았다.

나는 할머니 앞에서도 울고 할머니 뒤에서도 울었다. 울음을 참지 않았다. 아빠를 갑자기 데려가더니 바로 할머니까지 이렇게……. 하늘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비극은 이렇게 한꺼번에 몰려오는 구나. 나는 이제 천애고아가 돼버렸다. 모든 핏줄이 시들고 모든 신경이 말라 비틀어졌다. 내 영혼은 천 갈래 만 갈래 찢겨져 더 이상 온전한 사고를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어느 날 할머니에게 밥을 먹이는데, 할머니가 내 손을 가만히 잡아주었다.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나를 바라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맑고 깨끗한 눈동자, 희미하고 조용한 미소. 순간 내 몸의 모든 세포에서 눈물이 솟구쳤다. 할머니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아빠를 떠올리며 사랑한다고 생각하면 내 마음을 제대로 표현한 것 같았다. 할머니는 그게 안 되었다. 할머니를 향한 마음은 사랑이라는 말로도 다 설명이 되지 않았다. 내 존재의 뿌리는 할머니였다. 할머니가 보고 싶으면 할머니를 보면 되었다. 할머니를 만지고 싶으면 할머니를 만지면 되었다. 할머니와 얘기하고 싶으면 그냥 말하면 되었다. 할머니 뿌리에서 내가 태어나 보이지 않는 줄기로 엮여 두 몸이지만 한 삶을 살았다. 분리될 수 없는 하나였다. 나는 그것이 영원할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제 할머니와 나는 망망대해에 떨어져 각각 다른 파도에 휩쓸려 알 수 없는 세계로 각자 흘러가고 있었다. 말할 수 없이 두려웠다. 격렬한 슬픔이 덮쳐와 숨도 쉴 수 없었다. 슬픔 속에 슬픔이 있고 슬픔 속에 또 슬픔이 있었다. 슬픔이 밀려들고 또 밀려들었다. 슬픔에 몸이 녹아 없어질 것 같았을 때, 슬픔은 어디서 오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슬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할머니의 보살핌을 더 이상 받을 수 없어서 이러는 걸까. 할머니와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수 없어서 이러는 걸까. 어쩌면 할머니는 더 이상 나를 돌보고 싶지 않을 수도 있고 나의 수다를 더 듣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이제 진정으로 할머니는 가사노동과 육아와 걱정에서 해방되었다. 할머니는 자유로워졌다. 고단한 이 세계와 결별하고 할머니의 세계로 들어가면서 자유와 해방을 얻었다. 이런 생각에 다다르자 간신히 울음을 그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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