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로 Moreau May 16. 2024

가둘 것인가, 말 것인가?


오늘 문득 클림트의 그림 [다나에]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떠올라 그림과 함께, 그에 관한 그리스 신화를 다시 찾아보았다.


Danaë, Gustav Klimt


다나에의 아버지, 아르고스의 왕 아크리시오스(Akrisios)는 아들이 없어 고심했다. 언제쯤 아들을 얻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돌아온 신탁은 "손자가 그대를 살해할 것"이라는 엉뚱한 말이었다. 두려움에 빠진 왕은 하나 있는 딸을 청동 문이 달린 높은 탑에 감금했다.


그러나 그런 높은 곳에 감금된 다나에의 아름다움은 그만 하늘신 제우스의 눈에 띄고 말았다. 제우스는 황금소나기로 변신해 나다에와 결합하고, 그 사이에서 영웅 페르세우스가 태어난다. 신의 노여움이 두려워 태어난 아기를 죽일 수 없던 아크리시오스는, 아기와 다나에를 나무 상자에 넣어 바다에 던졌다. 그러나 제우스가 바다의 신에게 선처를 부탁해 둘은 바닷속 깊이 가라앉지 않고, 어느 에 닿게 된다. 그곳에서 한 어부에게 구출되지만, 그 어부의 형이었던 그 섬의 왕은 아름다운 다나에에게 흑심을 품었다.


그러나 다나에 곁에는 어느새 장성한 아들 페르세우스가 있었다. (신화 속 영웅들은 굉장히 빨리 자란다!) 섬의 왕은 페르세우스를 제거하기 위해, 그에게 말을 한 필 구해오라 했다. 외딴섬에서 말을 구할 방법은 전혀 없었다. 그러자 그는 다시 페르세우스에게 무시무시한 괴물인 메두사의 머리를 잘라오라는 명을 내린다. 메두사는 본디 머리칼이 매혹적인 절세미인의 처녀였으나, 신의 저주를 받아 머리칼이 모두 독사로 변해버린 괴물이다. 어찌나 무시무시하고 흉측한지, 그를 쳐다보기만 해도 모두 돌로 변해버린다.


Caravaggio, Medusa


그러나 제우스의 아들이 임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모든 신들은 도움을 아끼지 않는다. 용맹한 전사들을 보호하는 아테나 여신은 그에게 거울처럼 반짝이는 청동 방패를 주어 메두사의 얼굴을 직접 마주하지 않을 수 있게 했다. 간계의 신 헤르메스는 자신의 날개 달린 신발과 메두사의 목을 자를 도끼(혹은 낫)를 주었다. 지하의 신 하데스는 마법의 투구를 주어 페르세우스가 위기의 순간, 자신의 모습을 감출 수 있게 했다.


좀 더 특이했던 건, 메두사가 사는 곳을 알고 있는 세 노파의 이야기다. 날 때부터 머리가 하얘서 그라이아이Graiai라 불리는 세 노파는 셋이서 눈 하나를 번갈아가며 붙여서 세상을 본다. 메두사가 있는 곳을 묻는 페르세우스에게 그들은 알려주지 않으려 한다. 페르세우스는 그들이 눈을 옮기는 때를 노려, 재빨리 눈알을 낚아채고 메두사가 있는 곳을 알려주지 않으면 눈을 주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그래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메두사가 숨어 사는 곳을 알려주게 된다.


많은 신들의 도움으로, 페르세우스는 메두사의 머리를 자르는 데 성공한다. 심지어 메두사의 목에서 튀어나온 천마 페가수스까지 얻은 영웅은, 그 말을 타고 돌아오는 도중 바다괴물에게 바쳐진 아름다운 공주 안드로메다를 구출하고 그와 결혼해서 돌아온다. 메두사의 목을 베어왔다는 걸 믿지 못했던 섬의 왕은, 자루에서 메두사의 얼굴을 꺼내보다가 돌로 변해버렸다. 다나에와 아들 페르세우스는 고국으로 돌아갔다. 신탁을 두려워한 다나에의 아버지 아크리시오스(Akrisios)는 다른 곳으로 피신했으나, 운동 경기에 참여한 페르세우스가 던진 원반에 '우연히' 맞아 죽게 된다.


*


융을 읽고 있어서 그런가, 내겐 다나에가 아크리시오스의 아니마처럼 읽힌다. 그의 여성성인 다나에가 갇힌 곳에는 청동 문이 있다. 페르세우스도 청동 방패를 통해 메두사를 보았듯이, 다나에는 청동문에 자기 자신을 비춰보았을 것이다. 황금은 신성함 혹은 순수함이고 소나기는 해갈의 상징이다. 세속적인-남성적인 왕의 마음속에 자리한 여성성은, 신성함과 순수를 향한 갈망을 채웠고 거기서 새로운 영웅이 탄생했다.


그러나 영웅이 완성되려면 고난이 필요하다. 모든 영웅은 심연의 바닷속(이라는 무의식)에 일단 던져지고, 그곳에서 다시 (의식으로) 구출된다. 영웅이 잘라야 하는 괴물의 머리는, 어쩌면 자기 자신의 기고만장하는 머리다. 그래서 카라바조는 메두사의 얼굴에 자기 모습을 그려 넣었을까? 내 눈이 보지 못하는, 유일한 것은 나 자신이다. 그런데 만약 내가, 셋이서 하나의 눈으로 세계를 봐야 한다면? 내 눈이 다른 이에게 가 있는 동안의 내 눈에는 내가 보일 것이다. 그래서 그라이아이들만이, 나 자신의 괴물 머리인 메두사가 숨어있는 곳을 아는 것이 아닐까?


기고만장하는 의식의 머리를 베어내어야만, 바다의 괴물에게서 구출한 무의식의 공주와 결합할 수 있다. 그때에야 비로소 대극이 합일을 이룬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예전의 왕은 죽어야 한다. "손자에 의해 죽을 것"이라는 신탁은 예언이 아니라, 어쩌면 명령이었다. 그런데 만약 왕이 딸을 탑 속에 가두지 않았다면, 죽지 않았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죽지 않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러니 가두든지 말든지, 그냥 마음대로 하시오! (오늘 내가 다나에를 떠올리며 가두어버리고 싶은 게 있었는데, 그게 뭔지는 절대 말하지 않겠다! ^^)



매거진의 이전글 상상의 인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