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로 Moreau May 15. 2024

상상의 인도

인도에 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니 그래서 인도에 가지 않고 인도에 대한 나의 '상상', 인도에 대한 내 안의 관념에 대한 글을 써봐야겠다고 언젠가 마음먹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오늘 요가 수련을 마치며, 오늘이 바로 그날이라고 결정했다. 카뮈의 스승인 장 그르니에도 그랬고(그르니에가 쓴 글의 제목을 차용했다), 이름은 잊은 어느 시인도 그랬으니, 나라고 그러지 못할쏘냐. (물론 그들 만큼 훌륭한 글은 안 될 테지만.)


*


내게 인도에 대한 가장 큰 환상을 심어준 건, 아주 오래전에 읽은 류시화의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이었다. 인도의 걸인들은 돈을 줘도 고마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누군가로 하여금 적선이라는 선행으로 악업을 씻을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에 오히려 감사를 받아야 할 입장이라는 것이다.


또 인도 사람들은 기차에서 함께 탄 여행자가 뻔히 보는 앞에서 그 여행자의 배낭을 뒤져 아무렇지도 않게 그 여행자의 휴지를 꺼내 쓴다고 도 했다. 왜 내걸 마음대로 꺼내냐고 따지면, 이 세상에 네 것이 어디 있느냐고 네 가방에 들어 있을 뿐이지 그게 본래 네 것은 아니라는 질책을 받는다고도 했다. 궤변 같은 소리지만, 한편 철학적이기도 한 그런 말을 쉽고 자연스럽게 내뱉는 사람들이, 나는 너무 궁금해지고 말았다.


*


그 책을 읽고 정말로 인도에 한 번 가 보고 싶어서, 인도 여행 정보를 찾아보았다. 당시 나는 젊은 여성이었으므로, 여행 카페 같은 곳에서 젊은 여성들의 여행 후기를 찾아서 열심히 읽어보았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어떤 후기를 읽고 나서, 인도 여행에 대한 마음을 접었던 것이다.


"그냥 내 엉덩이는 내 엉덩이가 아니다~ 생각하고 다니세요."


아, 배낭 속에 든 휴지나 뭐 그보다 좀 더 비싼 물건까지는 철학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으나, 내 몸뚱이마저 내 것이 아니라는 관념까지는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전, 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가 젊은 시절, 혼자서 인도를 몇 달 동안이나 배낭여행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친구는, 꽤나 미모의 여성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의 엉덩이가 무사했었는지 물었다. 그러자 그 친구 왈,


"전혀, 아~무 일도 없었어. 특히 너 같은 사람은 절대로 아~무도 안 만져."


흠. 뭔가 안심이 되면서도 묘하게 썩 좋지는 않은 오묘한 기분이 드는 대답이었다. 아무튼, 나는 언제고 인도에 가도 되겠다.


*


또 오래전 읽은, 인도 이민자 2세 작가 줌파 라히리의 [저지대]라는 소설이 있다. 인도에서 태어난 두 형제가 등장하는데 동생이 결혼 후 정치적 사건에 말려 죽게 되었다. 그러면 동생의 부인은 자동적으로 형의 부인이 되는 게 인도라는 나라의 법칙인 것 같았다. 소설 속에서 형은 사랑하던 동생의 여자를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 여자를 데리고 머나먼 나라로 이민을 감행한다. 아마 지금도 인도에서는 아직 그런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 것 같다. 근대 사회의 평등주의와 또 자본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여전히 '카스트'같은 게 실존하는 나라가 아닌가.


카스트가 유지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아마도 그들이 '윤회'라는 것을 철석같이 믿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생은 전생의 업보에 따른 것이며, 다음번에 다르게 태어나려면 현재의 삶에 충실하면서 업보를 씻어 내야 한다. 그런 생각들에 대해, 예전에는 참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살아갈수록 점점 '윤회'를 믿고 싶어 진다. 전생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 생에서 내가 알게 되고 깨달은 것과 할 수 있게 된 많은 것들이 그냥 사라져 버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다음 생에는 여기서부터 시작하면, 뭔가 더 잘 살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나이가 들수록 자꾸만 드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다가 시간이 많을 때, 잠시 공상을 해보면 '윤회'가 썩 말이 안 되는 이야기도 아닌 것 같다. 집 안에 굴러다니는 먼지들을 볼 때마다, 저것들은 어디서 왔나 생각한다. 아무리 매일매일 청소를 해도 먼지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사실 나도 죽으면 저런 먼지가 될 것이고, 저런 먼지들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무한히 서로 조합이 될 것이고, 그렇다면 무한의 시간 속에서 또다시 나 같은 인간이 태어나지 말란 법도 없다. 그때는 제발, 좀 더 단단하고 좀 더 똘똘한 먼지덩이들이 서로 다시 만나기를!


*


요가 수련의 마지막은 항상 사바아사나(송장 자세)다. 격렬한 수련 동작들 끝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 시간은 그야말로 휴식과 평온 그 자체다. 그 자세의 이름 탓에, 그 순간에 종종 죽음에 대해서 생각한다.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먼지를 하도 많이 쓸고 닦아서 그런 건지, 요가 수련을 시작해서 그런 건지, 죽음은 끝이 아니라 단지 내가 모르는 것으로의 변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죽어서도, 아무것도 되지 않거나 뭔가를 행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요가의 송장 자세는 너무 편해서 계속 그러고 있고 싶지만, 그 시간은 곧 끝이 나고 다시 일상으로, 그리고 또다시 격렬한 여러 가지 자세로 변신해야만 한다. 그렇게 수련을 하면 할수록, 더 많은 송장 자세를 거쳐야 되고, 그럴수록 몸은 더 단단하게 단련된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 다시 눈을 떠 새로운 일상을 살아간다. 그 사이는 역시 죽음과도 같은 시간이다. 그렇다면 다음 생까지 갈 것 없이 지금 이 생에서도, 매일 좀 더 강하게 좀 더 똘똘하게, 윤회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렇더라도 난 아직, 지금 내 엉덩이는 그냥 내 엉덩이라고 생각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