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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로 Moreau May 11. 2024

흥!!


4년 전, 6년 동안 살던 집에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새로운 집으로 짐을 옮기고 나서 내가 쓰던 책상을 새로운 자리에 배치하고, 나는 책상의 구석구석을 쓸고 닦았다. 그러다가 책상 상판 아래쪽까지 걸레질을 하는 도중, 아주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렇게 쓰인 밀서(?)를 발견했다.


“엄마 미워! (메롱하는 혓바닥 그림) XX만 좋아해, 흥!!”


범인은 둘째 딸이었다. 어린 딸의 질투 대상이 된 XX는 내가 인문학 공동체 활동에 열심이던 때, 그곳에서 함께 같은 책을 읽고 공동체 내에서 같은 활동을 하며 동고동락하던 학인이다. 처음 맛보는 인문학의 세계와 공동체 활동에 빠져버린 나는, 아마도 당시 초등학교에 막 입학한 둘째 딸에게 이전과 똑같은 관심을 주지 못했을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 그 상황을 바꿀 힘이 없는 상처받은 어린 마음은, 아무도 못 보는 곳 (그러나 그 감정의 대상인 나에게 아주 가까운 곳)에다 몰래 자기 마음을 털어놓았던 것이다.


*


첫째가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가기 시작할 때부터, 그동안 육아로 답답했던 나는, 아직 어린 둘째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동네 도서관이며, 생협 마을모임이며, 유치원 엄마들 모임이며 등등. 그러다가 생협 소식지 마을 기자 활동을 정기적으로 하게 되어, 매번 둘째를 데리고 회의에 참석해야만 했다. 하루는 내가 그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했는데, 둘째가 집에서 노는 모습을 처음 본 사람들은 놀라서 이렇게 물었다.


"아니, 쟤가 저렇게 말을 잘하는 애였어요?"


어릴 때부터 낯가림이 심했던 둘째는 당시 서너 살이었는데, 내가 어딘가 낯선 곳에 데리고 가면 다른 사람들 옆에는 가지도 않고 내 등 뒤에 숨어 혼자 조용히 놀곤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둘째가 그때까지도 말문이 안 트인 줄 알았다고 했다.


여러 사람이 있을 때 참견하고 재잘거리는 첫째와 달리, 둘째는 혼자서 놀 때 많이 재잘대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낯선 장소와 낯선 사람들 앞에서는 그저 입을 다물고 주변을 관찰하면서, 싸돌아 다니는 엄마 덕분에 힘겨운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아직 글자를 쓸 줄 몰랐고, 사람들 이름도 몰랐던 아이는, 그저 가끔 내 앞에서 이렇게 (별 소용도 없는 말을) 외쳤다.


"한X림(생협 이름) 싫어, 흥!!"


*


오늘 오전 근무에 함께 일하게 된 선배 활동가 두 분은 공교롭게도 모두 매우 외향적인 분들이셨다. 처음 일을 시작한 내게 도움을 주려는 말과, 하나라도 더 뭔가를 알려 주려는 말과, 또 어떻게 하면 안 된다는 주의사항의 말과, 너무 잔소리같은 소리를 많이 해서 미안하다는 말과, 그렇지만 이게 다 나를 위한 거라는 등등의 무수한 말들을, 일하는 내내 끊임없이 내 귀에 쏟아 놓으셨다.


가뜩이나 아직 일을 익히지 못한 내 몸은, 그 말들에 신경을 많이 쓰느라 효율이 더 떨어지고, 그러면 선배님들은 또다시 더욱 많은 말들을 쏟아내시고, 그러면 또 신경 쓰느라 내 몸은 더 효율이 떨어지고...이러한 악순환이 이어지는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집에 돌아온 뒤, 나는 나도 모르는 새 잠시 정신을 잃었다.


그러다 벌떡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았다. 오래전 둘째가 내게 밀서를 써 놓은 바로 그 책상이다. 나는 책상 앞에서, 선배님들이 해준 말씀을 다시 떠올리려 노력하고, 다는 못해도 생각난 것들만은 잊지 않으려고 작은 수첩에 열심히 기록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옆에 놓아 둔 스피노자 독서노트 맨 뒷장을 펼치고, 아무도 모르게 그리고 일부러 좀 삐뚤빼뚤하게, 이렇게 적었다.


"XXX(선배 1), 바보 떵개!"

"YYY(선배 2), 똥 멍충이!"


그러자 오래전 내게 밀서를 적던 둘째 딸의 마음이 어땠을지, 조금 짐작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 근무 때, 두 선배님들을 다시 만나면 왠지 더 반갑고 더 고마운 마음이 들 것만 같아졌다. 후후후후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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