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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로 Moreau May 10. 2024

노랑 비타민

오늘은 오후 근무가 있는 날. 처음 해보는 일에 적응하느라 일주일 동안 엉망이 된 집안 구석구석을 정리하다 보니, 오전 시간도 꽤 흘러가 버렸고 기운도 많이 써 버렸다. 이러면 안 되지. 근무 가기 전에 책도 좀 보고, 마침 오후 수업인 큰 딸이랑 맛있는 브런치도 해 먹으려고 계획했는데. 그러고도 오후 근무를 거뜬히 해내야 한다!


나는 잠시 쉬면서 간식 선반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커다란 비타민 통 하나가 눈에 띄었다. 언젠가 수험생인 딸아이를 먹이려고 사다 놓았던 것인데, 그런 거 싫어라 하는 아이에게 나 또한 챙겨 먹이지 못해서 거진 남아있었다. 그래, 나라도 먹고 힘을 내자! 평소에는 그런 보조식품을 무시하던 나이지만, 오늘만큼은 그 힘에 한 번 의지해보자는 마음이 일었다.


오랜만에 함께 있는 딸에게 맛있는 브런치를 해주려는데, 딸은 어제부터 떡볶이가 먹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침 냉장고에는 떡볶이 재료가 없었다. 오후 근무라 시간도 남고, 비타민을 먹어서 그런지 기운도 팔팔해진 나는, 룰루랄라 노래를 흥얼거리며 집 앞 상가에 있는 (이름만 슈퍼인) 구멍가게까지 슬리퍼 바람으로 쫄래쫄래 걸었다. 요사이 며칠간 내린 비로, 하늘은 맑고 햇살도 눈부셨다. 바람마저 시원히 불어오니 기분이 참 상쾌했다.


*     


"떡볶이 하실라고요?"


구멍가게 주인아저씨는 내가 골라온 품목들을 보고, 단골인 내게 인사말을 건넨다. 나는 딸이 라면 사리를 꼭 넣어달라고 당부한 말이 생각났다.


"네 그런데 혹시, 사리면 있나요?"


급할 때면 자주 가는 곳이지만, 급한 품목만 사 오기 때문에 작은 가게 안에 오밀조밀 모여있는 물건들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갈 때마다 작은 가게라서 없지 않을까 싶은 것들은 신기하게도 늘 있었는데, 오늘도 역시 그랬다. 내게 사리면을 건네주면서 아저씨는 또 한마디를 건넨다.


"떡볶이에는 라면사리가 들어가야 맛있죠~?"


내가 가지고 간 장바구니에 물건을 담으려 하면, 주인아저씨는 또 언제나 '장바구니를 가져오셨네요'라며 반가워한다. 동네 구멍가게라서 장바구니를 들고 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계산을 마치고 나오려는데 아저씨는 내게,


"혹시 이런 것 드시나요?"  


라면서, 비타민 음료병을 내민다. 내가 들어서기 전부터 아저씨가 마시려고 꺼내 두었던 것 같다. 나는 약 0.1초간 고민하다가 병을 받아 들고 대답했다.


"아, 고맙습니다~"


방금 전에 비타민을 먹었지만, 단골손님 대접해 주시는 성의를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받아서 집에 갖다 두면 되지. 그런데 아저씨는 너무 친절하게도 뚜껑을 돌려 따주기까지 하면서, 그 뚜껑을 바로 쓰레기통에 버려주기까지 하시는 게 아닌가.


"지금 시원할 때 드셔요~"

"아, 네네 감사해요~"


평소 비타민제 같은 걸 먹지 않는 나는, 비타민 음료 같은 것 역시 입에 대지 못한다. 그러나 슬리퍼를 끌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시원한 비타민 음료를 몇 모금씩 맛보며 걸었다. 하늘은 여전히 맑고 햇살은 아까보다 더 눈이 부시고, 바람도 좀 더 상쾌해졌다.


집안 일과 브런치 떡볶이와 수다와 책 읽기까지 하고 나간 오후 근무가 피곤할 만도 한데, 귀가 후 저녁 식사 후에도 친정 엄마와 즐거운 담소까지 나눌 만큼 나는 하루종일 너무 쌩쌩했다. 아, 물론 가슴은 이상하게 계속 벌렁댔고, 소변 색이 비타민 음료처럼 샛노래서 좀 놀라기는했다. 아침 8시부터 밤 11까지 열려있으면서, 급할 때마다 무엇이나 내어주는 작은 구멍가게의 영업 비밀은, 바로 노랑 비타민이었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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