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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로 Moreau May 10. 2024

하얘져요?

생협 매장활동가로 일한 지도 벌써 어언 일주일째. 그렇게 크지도 않은 매장 안에는 아직도 내가 잘 모르고, 이용하지 못한 물품이 많이 있다. 나 역시 이 매장의 오래된 단골 조합원이지만, 나는 먹을거리 위주로 이용했었다. 그러나 매장에는 먹을거리뿐만 아니라, 세제나 화장품 찜질팩이나 폐페트병으로 만든 가방 같은 물품도 있다.


이번 달 신규 물품 중에는 뺨에 붙이는 비타민 팩이 들어와서, 매장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입구 쪽에 진열되어 있었다. 장 보러 온 어느 조합원님이 나를 붙들고 그 물건의 용도와 사용법을 물어보신다. 나는 옆에 놓인 샘플을 보여드리면서, 눈 아래 뺨 기미가 많은 곳에 요래요래 붙이시는 거라고 알려드린다. 그랬더니 그분이 눈을 커다랗게 뜨시며, 소프라노로 내게 묻는다.     


"그럼, 하얘져요?"

 

고거 몇 장 얼굴에 붙인다고 얼굴이 바로 하예지면, 얼굴에 기미 있는 사람이 남아나겠어요? 그러나 그분의 심정이 너무 이해가 잘 돼서, 웃음이 나왔다. 나도 그렇지만, 생협 매장을 애용하는 조합원들의 성향은 대체로, 들로 산으로 찾아다니는 자연주의자들이다. 그러니 나이가 중년을 넘어서면서 태양과 뜨겁게 사랑을 나눈 강렬한 흔적들이 얼굴 곳곳에 드러났고, 그게 어떤 때는 진지한 고민거리가 된다.


피부과에 가볼까 하다가, 돈도 많이 드는 데다 귀찮기도 하고 또 왠지 쑥스럽기도 하고 그래서 차일피일 그냥 기미랑 같이 살아가고 있다. 어떤 날에는 거울을 보면서, 그래 너도 내 뜨거운 날들의 역사(歷史)인데, 후벼 파 버리는 것이 너무 잔인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또 다른 날에는, 기미만 없으면 십 년은 젊어 보이고 인상도 훨씬 더 좋아 보일 것 같은데, 돈과 시간을 그냥 좀 투자해 볼까 싶기도 한 것이다.


"조합원님, 매일매일 꾸준히 붙이면 아주 쪼~~~ 오금씩은 하얘질 것 같은데요~"


내가 이렇게 대답하자, 그분은 몇 번 더 물품을 만지작 거리다 그냥 돌아서신다. 나와 연배가 비슷해 보이는 그분은 아마도, 하예지냐고 물어보면서도 그게 어렵다는 걸 이미 알고 계셨을 것이다. 매장을 나서는 그분의 뒷모습에 대고 '하얘지지 않아도, 저는 당신의 뜨거웠던 날들의 역사를 존경합니다!'라고 소리 없는 인사를 한다. 그래도 물품 테스트를 위해서 그 비타민 팩을 내가 직접 써봐야겠다! 하얘지고 싶어서 그러는 건, 진짜 아니라니까요!


*


생협 매장의 단골손님들 중에는 부모님 연배 이상인 조합원님들이 꽤 많다. 엊그제도 머리가 새하얀 어르신 한 분이 매장에 들어오시자마자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내게 뭔가 물어보려는 몸짓을 하시길래, 가까이 다가갔더니 대뜸 하시는 말씀이,


"아니야~ 내가 먹는 고기가 뭔지 넌 새로 와서 잘 모르잖아. 원래 있던 사람 불러와!"


물론 '새로 온' 나는 그분이 드시는 고기를 모른다. 그래서 얼른 선임 활동가를 모셔와 그분 앞에 대령했다. 그리고 그분이 무슨 고기를 드시는지 정말이지 너~어무 궁금해서 그 뒤를 졸졸 따라가 봤다. 대체 뭘 드시길래?


그리 크지 않은 생협 매장에는, 정말 크지 않은 고기 냉장고가 딱 두 개다. 하나는 냉장육이고 다른 하나는 냉동육. 그분은 냉장육 앞으로 가셨는데, 사실 냉동육도 얼마 되지 않지만 매장에서 판매하는 냉장육은 훨씬 적다. 그리고 나이 드신 분들은 대체로, 부드러운 안심을 찾으시는데 그분 역시 그랬다. 어쨌든, 드시는 고기를 얻으신 그분은 또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다슬기 좀 가져와 봐."


다행히 그날 아침 냉동 물품을 집품한 덕분에 재빨리 찾아다 드렸더니 이번에는,


"아니다, 다슬기 해장국으로 해야겠다."


그러셔서, 역시 냉동 물품인 다슬기 해장국으로 바꿔다 드렸다. 그런 다음 만족스럽게 계산을 하시더니, 매장을 나서려다 말고 또다시 나를 부르면서,


"초고추장 하나 가져와 봐, 날짜 제일 좋은 걸로!"


나는 잽싸게 진열대로 달려가 제일 뒤에 숨겨둔 소비기한 제일 긴 초고추장 하나를 가져다 드리면서 대답했다.


"날짜 진짜 쩨~~~일 좋은 걸로 드렸습니다!"


그러자 흡족한 모습으로 돌아서 매장을 나가신다. 그 어르신 옆에 내내 붙어 있던 간병인처럼 보이는 분과 함께. 나는 그 어르신의 뒷모습에 대고 또 혼자서 소리 없는 인사를 한다.


'저도 이젠 어르신이 드시는 고기 뭔지 압니다, 다음엔 저한테 말씀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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