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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로 Moreau Jun 06. 2024

쥐꼬리를 쪼개고 쪼개면


드디어, 첫 월급날이 왔다. 최저 시급제 근로자이므로, 내가 일한 시간으로 계산해 보면 얼마가 나올지 알 수 있지만, 숫자에 약하고 계산에는 더욱 약한 나는 그저 '기대'만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계산도 안 한) 나의 예상과 크게 빗나가지 않는 ‘쥐 꼬리만한’ 급여가 들어왔다. 암튼, 십수 년 만에 그림자 노동이 아닌, 임금 노동의 대가를 손에 쥐게 된 나는, 월급이 들어오기도 전에 이미 신이 나서 가족들에게 호기롭게 이렇게 외쳐두었던 것이다.


"첫 월급 기념으로 쏜다, 갖고 싶은 거 다 말해!"


 *


그랬더니 어라. 처음에는 물질적인 선물 '따위'는 필요 없다며 사양하던 남편을 시작으로, 친정 엄마와 두 딸까지 줄줄이 이런저런 버킷 리스트를 들이미는 것이 아닌가? (얘들아 잠만! 나 최저시급 노동자라니까... ㅠㅠ)  그래도 뱉어놓은 말을 주워 담을 수 없던 나는, 우선 남편의 선물부터 주문했다. 그랬더니 쥐꼬리만 했던 게 순식간에 지렁이만 해지는 게 아닌가. 그래도 거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그날이 월급날인 것을 아시는 친정 엄마가, 나를 향해 평소보다 유난히 환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지렁이 머리만큼을 엄마 손에 (용돈 하기에는 너무 부족해서 ㅠㅠ) 복돈이랍시고 쥐어드렸다.


갖고 싶은 게 다양한 딸들은 다행히(?) 아직 받고 싶은 선물을 정하지 못했다. 마침 휴무인 오늘, 나는 가족들에게 특히 아이들에게 월급도 받기 전부터 이미 신나서 약속했던 대로, 맛있는 (그리고 당연히 비싼)것을 먹으러 가기로 했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한껏 즐거운 목소리로 "빨리 먹으러 가즈아~"하고 외쳤지만, 머리까지 떨어진 지렁이뿐인 내 속은 그저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 마음이 결국 티가 났던 것일까? 맛있게 먹는 동안에는 마냥 즐거워하던 아이들마저, 계산서 앞에 선 내게 갑자기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헉! 엄마, 괜찮아요?"  


"그럼, 괜찮아~ 이 돈 없었을 때도 잘 살았는데, 뭐!"


그러나 실은 별로 괜찮지 않았다. 오래전 임금 노동자 일 적에는 분명 그러지 않았었는데, 이제 (최저) 시급 노동자가 되어서 그런 것인가. 머릿속에서 돈이 '시간'으로 자동 환전(?) 되어, 내 시간이자 내 인생이 '순삭'되는 느낌에 자꾸만 마음이 '후덜'거렸다!


*


그리하여 결국 나는, 아이들에게 했던 선물 약속을 다음으로 미루고 말았다. 지렁이 꼬리만큼의 시간의 보상은 내 수중에 남겨두어야 마음이 허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다. 게다가 내게는 가족 말고도, 이 보잘것없는 지렁이 꼬리의 기쁨을 함께 나누어야 할 몇몇의 친구들도 아직 남아있다. 아,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이여, 지렁이 꼬리의 꼬리의 꼬리에서 제발 좀 일어나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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