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르mihr Sep 04. 2024

바람 불면 날아갔던...

엄마는 원래 날씬했다

무릎 주사를 맞으러 정형외과에 갈 때면 의사들은 엄마에게, '운동하고, 체중을 좀 줄이라'고 충고하곤 한다. '선생님들' 앞에선 그저 '네네'하던 엄마는, 돌아서면 바로 콧방귀를 뀌며 말한다.


"이래 봬도 옛날엔 사람들이 나보고, 바람 불면 날아간다고 그랬어!"


아마 정말 그랬을 것이다. 만약 인생의 모든 것에 총량이 있다면, 운동이나 단식에도 그 총량이 있을 텐데, 엄마는 아주 오래전에 이미 그 분야에선 총량을 다 채웠기 때문이다.  


*


대대로 지주였던 엄마의 친가는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 쫄딱, 완전히 망했다. 끝을 헤아릴 수 없던 땅이 모두 다른 이들의 소유가 되어버린 뒤, 엄마 가족은 새로운 희망을 찾아 서울로 갔다. 오남매 중 둘째였던 엄마는, 그때부터 졸지에 소녀 가장이 되었다. 지주 아들로 살아온 엄마의 아버지가 도시-빈민-노동자로서의 삶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한동안 집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하숙생활하며 직장에 다녔다. 엄마는 그때 매일 점심을 굶어야만 했다. 물론 집에서 점심을 먹을 수 있을 때에도, 성당에서 나눠 준 강냉이죽이 전부이긴 했지만 말이다. 지금처럼 점심을 해결할 만한 저렴한 가게도 없고, (친할머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란 엄마는) 자기 도시락을 쌀 수 있는 (가사 노동) 능력도 없었다.


남들이 밥 먹는 걸 매일 지켜볼 수는 없는 노릇이라, 점심시간이면 엄마는 일터 앞에 세워진 자전거를 탔다. 온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나면, 그럭저럭 점심시간이 지났다. 물론 배는 더 많이 고파졌지만, 자전거를 타는 동안에는 기분이 아주 상쾌했다. (운동을 해보면 알겠지만, 배가 부른 것보다야 배 고픈 상태에서 운동을 하는 게 훨씬 더 잘된다!) 그런 어린 엄마가 무척 씩씩해보이면서도, 좀 답답한 마음이 들 때면 나는 못 참고 기어이 한마디 한다.


심약한 딸 : "아니 아무리 그래도, 자기 밥값은 남겨 놓고 집에다 돈을 갖다 줘야지!"

우렁찬 엄마 : "아부지는 맨날 술만 먹고,

                   우리 엄마는 맨날 돈 없어서 쩔쩔 매고,

                   막내 동생은 '나는 강냉이죽 절대 안 먹어' 그러면서 우는데 어떡해?"


인내심 없이 그저 똑똑한 체만 했던 나의 마음은, 그래봐야 그저 조금 더 답답해질 뿐인 것을.


*


그후로도 오래도록 엄마의 삶 속에서 (못 먹어서) 날쌘 몸매와 노동의 강도는 비례 관계였다. 그러니 이젠 먹고 싶은 것 좀 실컷 먹고, 편하게 앉아서 (TV와 유튜브로나마) 즐겁고 신기한 온갖 세상 구경을 좀 해도 되지 않겠나. 엄마와 긴 산책을 하고 싶은 나의 욕망은, 오래전 날씬했던 엄마보다 너무 늦게 도착했다.  


사람들 저마다의 인생 시계는, 모두 같은 방향으로만 흘러가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작가의 이전글 황서방과 보리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