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고원> 하루 네 쪽 읽기, p.187~190
창조적 말 더듬기. 말을 더듬기는 쉽다. 하지만 언어 자체가 말더듬이가 되는 것은 다른 문제다. 그것은 모든 언어적 요소들과, '표현-변수'나 '내용-변수' 같은 비언어적 요소들마저, 변주하는 일이다. 프루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걸작들은 일종의 외국어로 씌어진다." 그것은 말더듬기와 같은 것이다. 단지 파롤만이 아니라 랑그가 말더듬이가 되는 것이다. 네 모국어 속에서 외국인이 되어라.
Le bégaiement créateur. Bégayer, c'est facile, mais être bègue du langage lui-même, c'est une autre affaire, qui met en variation tous les éléments linguistiques, et même les éléments non linguistiques, les variables d'expression et les variables de contenu. Proust disait : «les chefs-d'œuvre sont écrits dans une sorte de langue étrangère.» C'est la même chose que bégayer, mais en étant bégue du lanage et pas simplement de la parole. Etre un étranger, mais dans sa propre langue.
마흔 즈음의 어느 날, 내 몸체는 갑자기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운 좋게 여행 책 한 권을 출간한 뒤에, 글을 쓸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썼다. 그러나 계속 쓰면 쓸수록 '그 나물에 그 밥' 같은 느낌이었고, 내가 써 놓은 글의 무게는 어쩐지 점점 더 가벼워지기만 하는 것 같았다. 글쓰기를 전공하지 않았기에 기술을 몰라서, 혹은 세상의 여러 깊은 지식에 관하여 아는 게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그때부터, 글쓰기 기술에 관한 책을 섭렵하기 시작했다. 또 그때까지 읽어볼 생각조차 못 해봤던, 어려가지 어려운 책들을 읽고자 인문학 공부를 아주 '빡세게' 하는 공동체를 찾아갔다.
그 때로부터 십 수년이 흐른 지금. 내 글쓰기는 여전히 기교도 없고 깊이도 얄팍하다. 그렇다고 달라진 게 영 없지는 않은데, 그건 내가 쓰는 글의 외형보다는 오히려 내 몸체의 내적인 변형이다.
오래전 내 몸체는 글을 쓰기 전에 우선, 내가 쓴 글을 읽을 사람들이 재밌어하기를 먼저 바랬다. 지금 내 몸체는 '역시 내게는, 내 글이 제일 재밌네!' 이런 감탄을 한다. 또 예전에는 글을 쓰기도 전에 내 몸체가 쓴 글이 어떻게 끝날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 몸체는 자신이 쓴 글이 어떻게 끝날지, 쓰고 있는 중에는 아직 모른다. 어느 날부터인가 내 몸체는, 작가가 되겠다는 열망 대신, '작가-되기'라는 실험에 열중하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