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별을 떠나 우정은 나를 확장시킬 수 있다.
어렸을 때 나는 단짝 친구 한 명만 있으면 만족하는 사람이었다. 한 반에서 전체적인 친구들을 다 몰라도 나랑 친하게 쉬는 시간에 보낼 수 있는 단 한 명만 있으면 행복했다. 여러 명과 노는 것보다 한 명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이 더 든든했다. 어른이 되어서 이런 특성이 '사회적 본능'과 대조되는 '일대일 본능'이라고 불린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내가 성별이 다른 이성과 우정의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거의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래도 알고 모르는 것을 묻고 답하거나 시험 성적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묻는 정도의 대화는 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우정은 아니었고 피상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중학교 때는 한창 이성에 눈을 뜰 때여서 교회 오빠들과 친하게 지냈고 고등학교 때는 여고를 다녔기 때문에 다른 성별을 만나는 일이 거의 드물었다. 그래도 대학생이 되어서는 이성이든 동성이든 다양한 사람들과 많이 이야기 나누고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대학교의 자유로운 분위기와 다른 업무 중심의 문화 속에서 나는 다시 경직되고 말았다. 행실을 조심하지 않았다가 다른 사람의 가십거리에 오르고 싶지 않았기에 더욱 말을 줄이고 불필요한 대화를 하지 않았다. 그래도 점점 친해진 분들과는 조금씩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지만 같은 성별만큼은 아니었다.
애초에 나는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유교적 세계관으로 물들어 있는 사람이었다. 다른 이성과 함께 있는 상황 자체가 많이 부담스러웠고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늘 조심스러웠다. 상대방이 나에게 호감을 보이는데 내가 그 정도의 마음이 아닐 때는 더욱 그 관계가 부담스러웠다. 한 마디로 남녀 간의 우정이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못했다. 결혼을 하셨거나 이성교제를 하고 있는 사람이 다른 이성과 너무 친하게 지낼 때 그것을 보는 내 마음이 불안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것을 크게 문제로 여기지는 못했다. 많은 여성들이 남자친구의 여사친을 인정하기 힘들어하는 경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올해 나의 또래인 친구들과 어울릴 기회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성별은 다양하게 섞여 있었고 여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어쩌다보니 나의 속 이야기, 현재 깊은 고민도 나누게 되었다. 친구들은 나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고 조언해주었는데 그게 정말 도움이 많이 되었다. 그 자리에 본인의 여자 친구가 있는 남자들도 여럿 있었다. 이성관계로 발전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내 마음이 더 편했던 것 같다. (나는 둘 다 싱글이어서 이성관계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만남은 의도치 않게 상대방에게 여지를 남길 까봐 무척 조심스럽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편하게 보여주기를 부담스러워하는 편이다.)
한 미국인 친구는 애초에 나랑 같은 성별만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다른 성별을 가진 사람에 대한 차별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랑 사뭇 다른 세계관이라서 처음에는 이해하기가 정말 힘들었다. 그렇지만 그 친구가 다른 성별이라도 나를 진정한 친구로 대해주기 때문에 나도 편하게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남녀간의 선이란 어떻게 존재하는 것이 맞을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그 선을 너무 세우느라 나의 세계를 확장시킬 수 있는 기회를 너무 많이 놓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사람마다 성향과 가치관이 달라서 나와 정반대의 사람도 많이 있을 거라고 여겨진다.) 진지한 이성 관계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의사소통 과정이 필요하고 서로 마음이 있거나 한 쪽이 마음이 있어도 쉽지 않은 경우도 많다. 그러므로 사람 대 사람으로 소통할 수 있는 기회나 여지 자체를 갖지 않는 것은 너무 지나치게 조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일단 상대방의 성별이 어떠하든 일단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알아가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다른 성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나 조심스러움은 조금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그렇게 우정의 관계를 맺으면 나도 상대방도 확장된 존재로 세계를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